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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준 Sep 16. 2023

운명을 오롯이 마주하는 연습

생일 전날 행군을 하면서 깨달은 몸의 지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열화의 논리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갇혀살던 학창시절에, 애석하게도 문학은 향유의 대상 이전에 평가 항목으로만 느껴졌다. 독서 과목은 그런 경쟁의 압박에서 합법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이었고, 우린 먼지 자욱한 도서관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강독하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着目)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陽地)’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가장 빛날 시기에 20여년간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이어나간 부조리의 심오함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다만 창문과 문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관조와 실천이라는 철학적인 사유로 연결짓는 필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또 하나, 아직까지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는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지금부터 짊어지고 갈 슬픔의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감당해낼 힘이 나의 내부에,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풍부하게, 충분하게 묻혀 있다고 믿는다.


 불행을 오롯이 목도한 채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 생일 하루 전날, 야간행군을 마치고 너털걸음으로 복귀하는 길에 위 구절이 문뜩 떠오른건 결코 우연이 아닐테다.


의도에 의한 의미, 의도와 무관한 의무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사회가 부여한 의미는 줄곧 나의 군생활과 맞닿아있었다. 숨 돌릴 틈 없는 한 해의 벼랑 끝에서, 종강하고는 돌연 도망치듯 입대한게 성탄절 다음 날이고, 행군을 마치고 나면 내가 태어난 날이 찾아올 터였다. 평생에 걸쳐 우리를 이해할 배경이 되는 붙박이와도 같은 의미. 그 의미가 가지는 낙관의 보편성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나를 아프게 한다.


 마찬가지로 날씨라는건 기술문명의 밖에서 보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으로 그 자체의 존재를 지니는데, 나의 행군 절차는 철저히 계산 가능한 에너지로써의 날씨를 통해 집도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의 불행을 정당화한다. 이곳에 오고부터 첫번째 행군은 한파주의보에, 두번째 행군은 폭우주의보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제는 폭염주의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행군이 없었더라면 오전에 휴식을 보장받지도 못했을테고, 그렇다면 생각이 글로 응고되기 전에 나의 상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겠지. 행군을 하기 전에는 운이 좋게도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었고, 좋아하는 뮤지션의 무대를 보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불행만큼이나 행운이 충만하므로, 부정적인 사고의 악순환에 갇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건 분명 바람직하지 못하다. 불행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나 나는 보고야 말았다. 대위 진급을 앞둔 여군 장교가 출동 준비를 마치고는 자신의 군장에 방탄모를 내려놓자마자, 그의 군장이 기다렸다는듯 바닥으로 움푹 꺼지는 것을. 침낭과 야전삽으로 충만해야할 양감(量感)의 자리를 공기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자원해서 입대했을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인수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행동으로 대신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무를 지지 않겠다면,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이 상황에서 줄곧 말씀하시는 병사들의 책임의식과 의무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기 이전에 잠깐 멈추고 생각한다. 물론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말의 욕설에 담긴 해학성을 긍정했지만,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고작 욕짓거리나 하려고 그동안 읽고 쓴게 아니다… 너도나도 무거운걸 들기 싫은 가운데 작용한 르상티망(ressentiment)1)이 아무래도 원통한 감정의 원인이겠지.


 내가 느끼는 책임과 부조리한 감정도, 가지지 못한 것을 시샘하는 편협한 사고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판단의 불완전성을 인정한 뒤로는 완전군장을 매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어떻게든 내가 처한 상황을 긍정해보려는 투쟁을 이어나갔다.


삶과 죽음, 존재의 외면에서 비롯되는 불안


 그러나 나는 이윽고 삶을 긍정하는데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사고의 출발점이었던 생일, 즉 태어남부터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 동시에,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놓여져 있다. 간부가 자유에 따른 선택의 책임을 방기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선택하지 않은 운명의 책임 의식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으나, 애초에 인생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선택하지 않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규범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나의 인생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면서 살아오기도 했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의 기록에 의무감을 느끼고, 부조리한 세계의식을 견지한 채 괴로워한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확실히 우리는 삶과 죽음조차도 선택할 수가 없다. 존재의 시작과 끝이 선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는 이해의 범주를 벗어날 뿐더러, 우리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은 어디까지나 기술문명의 프레임 안에서나 가능하다. 이해관계에 맞게 조립된 자본과 권력을 하염없이 좇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능동성을 긍정한다. 그러나 공허한 마음 한켠에서는 알고 있다. 그런 세속적인 욕구는 마음 깊숙히 자리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고.


 인간이 동물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욕망을 돌파하고 존재자(2)들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존재자들의 본질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이 비본래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악용될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그런데 이성의 출범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존재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일조해왔다. 존재를 취사적으로 인정하는 거대한 기술문명을 구축한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대가로 마르지 않는 소외감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불안은 현대인의 만성적인 질환이 되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의 무거운 책임을 방기하고자 기술문명의 안위에 기대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래적 가치를 외면하도록 유도하면서 끊임없는 허무감을 자아낸다. 결국 언젠가 우리는 타인의 시선 앞에, 무의식의 폭력성 앞에, 삶과 죽음의 단상 앞에 놓여져야만 한다.



 따라서 불안을 넘는 유일한 방법은 불안을 마주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 대한 고유한 인식을 통해 삶과 죽음을 뚜렷하게 목도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 현대문명에서 자명하게 여겨지는 자유에 따른 책임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자연히 얻어질, 일상에 만연한 부조리를 감내하는 열정을 그려본다.


미워도 나의 운명이니까


그렇다면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니체가 제시한 미래 철학은, 시대와 무관하게 통용되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시대와 역사의 평면에서 구성되는 다원주의와 가변성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철학적인 문제에 명징한 정답을 제시하는건 절대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선택과 무관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나를 통해서만 경험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사실만은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나,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는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양귀자, <모순>


 운명은 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운명을 개탄스럽게 여길지언정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참하기에 끝까지 살고 싶다는 감정은 모순된게 아니다. 허무주의로 일관될 수 있는 현대철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얼굴을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의 태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맥락에서 강조되는 인간의 주체성과 개척정신에 입각해,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도 선택의 영역으로 포섭하고는 '나의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을 명확히 직시한다. 그게 아무리 나에게 생채기를 내서 죽도록 밉더라도 이미 나의 운명 안에 들어와 있는건 부정할 수가 없다. 미운 자식이기 이전에 나의 자식이고, 불평등한 나라이기 이전에 나의 조국이다. 나는 이들이 내게 부여하는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일은 선택의 자유와 책임과는 무관한 층위에서, 나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는 일이 될테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양귀자, <모순>


나는 나의 슬픔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품지도, 과거를 바라보며 후회를 일삼지도 않고 그저 현재의 운명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평생동안 이루지 못할 과업이라도 끝까지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 운명을 사랑하고, 내일을 바라지 않는 삶의 태도……




 (1) 니체가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동원한 개념인 르상티망(ressentiment)은 우월성에 대한 시기심으로 말미암은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이 로마 제국에 수복당한 설움을 극복하고자, 유대인들 스스로가 로마인이 가진 ‘진취성’을 유대인들의 덕목인 ‘성실성’으로 전복시켰다는게 니체가 생각하는 종교의 기원이다.


(2)하이데거가 주창한 개념으로,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지칭한다. 신, 동물, 인간, 사물을 비롯해 본래적 가치를 보유한 대상이 존재자다. 존재는 존재자들이 조화와 통일을 달성한 채 유기적으로 자신을 한데 드러내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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