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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K를 하느님이 도우사

“커피 괜찮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물이 아직 덜 끓었는데, 남자가 커피를 와락 붓는다. 까만 커피 알갱이가 커피잔 속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여자는 남자가 민망할까 열심히 커피를 휘휘 저어 본다. 이윽고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남자와 여자. 처음 만났던 이야기에서부터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어본다.

“컷!”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주거 상담사례 홍보 프로그램의 일일 주인공. 그 여자 나, 그 남자 K.

K는 처음에는 내 담당이 아니었다. 어느 날 오후 L 선생님이 상담 기록지를 들고 나에게 왔다. 상담 센터는 상담 오는 분들이 상담사를 선택하는 구조이다. 한 번 상담을 시작하면 보통 처음 상담한 사람이 그 사례를 끝까지 담당한다. 더군다나 L 선생님은 상담 경력이 많은 베테랑이다.

“선생님, 이 사례 좀 봐봐.”

“뭔데요?”

“집은 내가 방향을 잡았는데, 경제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서 조언 겸 상담 좀 해줘.”

그렇게 K와 만나게 됐다. K는 눈매가 선한 청년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살아계셨고, 외아들이었다. 처음에는 K에게 특별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어떤 일 하세요?”

K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이 사람 미소가 착하다.

“누가 소개해 줘서 카드 영업해요.”

“일은 할만하세요?”

“그게요.”

K의 흐드러지던 미소가 갑자기 시들었다. K는 카드 돌려 막기를 하고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돌려 막기란 신용카드 이용액을 결제할 돈이 없거나 모자라는 경우 다른 카드로 자금을 마련해 결재하는 일을 말한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빚더미에 앉고 병환으로 거동도 불편해지자 K는 급하게 일자리를 찾게 됐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카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내 더는 부탁할 사람이 없게 되었단다. K는 자기 명의로 실적을 채울 수 있도록 카드를 만들고 다른 카드로 메꾸기를 반복했다. 결국 스스로에게 영업을 하고, 부탁하게 된 셈이다.

“당장 그만두시고, 공사장이든 공장이든 우리 취업합시다. 딱 석 달만 눈 감고 참아봐요. 대신 다치지 않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본래 상담을 '잘 듣는 일'이라고 한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오지랖이 나왔을까. 빚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에, 나는 K에게 조금은 독한 그러나 진심 어린 충고를 해버렸다. L 선생님이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왜 나한테 보내서. 어쩌다 보니 나는 K의 인생에 개입하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후 몇 달 동안 K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공장에 취업했나, 이 사람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나는 하루하루 불안했다. 집을 구해주랬지 누가 남의 인생에 끼어들라고 했더냐. 자업자득이다. 자업자득. L 선생님에게 한 번씩 연락이 왔었는지 확인해 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그사이 불안한 마음이 K의 안녕을 위한 기도로 바뀌었다.

‘제발 별일 없게 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정말 다른 사람 인생에 함부로 개입 안 하겠습니다.’

몇 달 후 거짓말처럼 K가 나타났다. 사지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그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선생님 저 빚 다 갚았어요.”

나는 미처 그동안의 안부를 묻지도 못했는데, K가 나에게 숨이 가쁘게 말한다. 정말 공장에 취업했었다고 한다. 별일 없었길망정이지. 다행히 해피엔딩이구나. 쪼그려 있던 마음이 탁 펴지는 듯했다. 순박한 K를 하느님이 도우사.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우리나라는 청년이 살기 녹녹하지 않은 곳이다. 청년 주거 빈곤율은 17.6%로 전체 11.6%보다 높고, 서울은 29.6%에 달한다(아주대학보사, 2022.12.5.). 보육원 등에서 지내다가 홀로 독립해야 하는 자립준비청년은 더 힘이 든다. 자립준비청년의 35.9%가 주거 불안을 겪고 있으며, 약 절반 가까이가 우울 고위험군으로 보고되었다(복지타임즈, 2024.7.24.).

청년 주거 개선을 위한 대책으로 나라에서도 저금리 대출, 임대주택 등 정말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나는 청년 주거에 대한 대책으로 일자리 대책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쉬었음 청년'이 점점 늘고 있다. 불과 2017년까지 쉬었음 청년은 20만 명 대였으나, 2024년에는 44만 명으로 두 배이상 증가했다(미래경제, 2024.8.22.) 물론 청년들의 일자리 눈높이가 높아진 탓도 있겠다. 그러나 내게는 이 소식이 청년 주거 위험군의 증가로 느껴진다. 처음 만났을 때, K의 흐드러지던 미소가 지금도 이따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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