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역할로 살아가는 것이란

중간에 낀 삶

by 꿈꾸는 자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조금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특별한”이라고 일컫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인이다.

나의 남편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더치인(혹시나 해서 말인데 네덜란드인 = 더치인 ^^)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은 당연히 네덜란드와 한국의 피가 섞인 혼혈아이들로써 자연스럽게 4개 국어(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러시아어)를 한다.

우리 가족은 카자흐스탄에서 오랜 기간을 살았으며 현재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de Parel이라는 작은 호텔에서 60여 명의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고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우리와 친구가 된 우크라나인들과의 함께 하는 시간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모두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는 있으나 다행히도 정치적으로 말려들지 않아도 되는 제3 국인 카자흐스탄에 살았다. 먼저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의 공통점을 말하자면 이 세 개의 나라 모두 구소련 국가 였다. 그러기에 모두 러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고 또 문화도, 음식도 비슷한 면이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우리 가족은 러시아인을 만나든 우크라이나인을 만나든 우리의 중립적인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립적인 포지션이라는 강점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와 만나는 것에도 걸림돌이 없었다.






우리가 카자흐스탄에 살 때는 러-우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카자흐스탄으로 피해 온 수많은 건장한 러시아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으로 전쟁을 피해 온 러시아 남자들은 20만 명으로 이라고 한다. 신문 기사에서나 그 숫자를 본 것이지 그게 그만큼 가늠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가 은행 업무를 보러 은행에 갔다가 계좌를 열기 위해 아주 긴 줄을 만들어 서 있는 러시아 남자들을 보고는 그 수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2배로 뛴 월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뉴스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체감하게 했다.


그들 중 몇 러시아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만일 싸운다 할지라도 나라를 지키고 싶은 것이지 올바르지 않은 정책을 위해 싸우고 싶지 않다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매국노, 겁쟁이라 불릴지언정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도망쳤다고 했다. '도망'이라는 비열한 단어로 표현하기보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상황이 종식되면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선택한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설득되었다. 어쨌든 그들은 “공격자”의 나라에서 온 이들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떠한 일(그 어떠한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네덜란드의 de Parel이라는 작은 호텔에 있는 약 60여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 식료품을 공급해 주고 네덜란드어가 필요한 병원 예약이나 서류 작성, 보험 처리 등이 필요할 때 네덜란드어로 통역을 해준다. 그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 잘 적응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건장한 러시아 남자들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와 반대로 네덜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피해 온 여성들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왜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냐하면 건장한 남자들은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하기에 공식적으로도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크라난민들은 여성과 아이들인 것이다.


러-우의 전쟁을 뉴스에서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그들이 떨어지는 폭탄 파편을 기적적으로 피하며 어떻게 도망쳐왔는지, 그 이웃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남편과 아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전해져 왔다.


이 난민들은 네덜란드 정부가 제공하는 지원금으로 숙식이 해결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굳이 언어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인 청소나 공장, 양계장등에서 일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들의 삶이 선진국에서 세금으로 이뤄진 정부 보조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상팔자라지만, 그리고 그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만일 입장을 바꿔본다면, 누가 자기 나라에서 인정받는 대기업에서 부장급으로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원치 않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다 잃고 남의 나라에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와서 말도 모르고 그래도 데려온 자식이 있기에, 또 먼 훗 날 살아갈 대비를 해야 하기에, 양계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있다면, 그래서 원치 않게 자식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과연 상팔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들은 "공격을 당한" 나라에서 온 이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하나였다.


돌아갈 집이 있어야 돌아가지…… 집도, 살던 동네도 다 폭격 맞았는 걸. 그러니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벌어서 그다음을 살아가야겠지




감히 우리가 저들의 입장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리 가족의 “다른”배경이 우리로 하여금 의도치 않게 어딜 가나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쩔 땐 그 중간 다리가 상대방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순 없어도, 적어도 상대방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게 한다.

전에는 나는 이 빛도 없고 이름도 없는 어중간한,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듯한 이 '중간에 낀 역할'을 환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리가 없으면 건널 수 없지 않는가? 소통이라는 것도 다리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이 역할에 감사하며 정치적 성향, 신분을 떠나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오늘 우리의 곁에 주신 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다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