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OO대 여신의 현)난임 일기
OO대 여신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수십 년 전이라 가능한 일이지 요즘의 어린 친구들과 학교를 다녔다면 절대 그런 말을 듣진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내가 대학을 다니던 05년도에는 다이어트나 성형수술, 외모에 대한 관심은 지금에 비해 현저히 낮았고 나는 남학생들이 많은 학과에 속해 있어 주목받기 쉬웠다.
지금은 N 년 전 결혼 후 신혼을 즐긴다며 딩크로 살다 최근 난임휴직으로 시험관 4회 차를 진행 중인 30대 후반 여성이 되었다. 호르몬 탓인지 나잇살 탓인지 이제 과거의 영광은 찾아보기 힘든 평범녀가 되었다.
통계학으로 보면 나는 늘 상위 10~20% 정도에 속해있었다. 학업, 외모, 자산, 대부분이 약간 상위권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는 딸이었는데 도무지 임신이라는 기대는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남들은 쉽게 하는 것을 해내지 못하는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평생 없던 불면증이 생겼다. 잠이 안 오는 날엔 좋아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반지의 제왕을 호빗부터, 왕좌의 게임을 시즌 1부터, 조선 전기를 1392년부터 차례로 나열하다 보면 어느새 잠에 들었다. 시험관이 고차수가 되면서 연대기를 풀로 읊어도 아침은 멀어지는 날이 많아졌다. 더 이상 곱씹을 이야기가 고갈되자 나는 가장 디테일하게 끌어낼 수 있는 과거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마음 속 비밀 서랍에 간직한 이야기, 바로 나의 과거연애사이다.
내 인생의 남주라고 생각했던 전 남자 친구들,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기억을 헤짚고 떠오른다.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내 인생의 서브남들은 내가 가장 자세히 알고 있어 소재가 고갈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 긴긴밤에 딱 적합한 연대기가 아니던가.
잠을 깬 상태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어려운 흐린 아침,
알람에 맞춰 일어나 차가운 알코올솜으로 배를 닦고
배꼽에서 3cm 떨어진 지점에 능숙하게 90도를 유지하며 주사를 놓는다.
평범한 난임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