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오지 않을까?
다케오온천역(武雄温泉駅)에 도착하자 흐리다. 거짓말처럼 빗방울도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빌릴까 말까 고민하다 일단 빌렸다. 오래된 구형 아이폰이라 배터리가 실시간으로 줄어든다. 줄어드는 배터리 용량만큼 다케오에서의 여행 시간도 줄어들었다. 구글이 알려주는 경로라는 것이 최단 시간으로 설정된 것인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넓은 도로를 나두고 산길이라면 산길 같은 언덕을 오르게 만들었다.
Travel Takeo by SUKAVIA
구글맵을 100% 신뢰하지는 않지만 초행길에는 어쩔 수 없다. 고민 끝에 언덕을 오르며 목적지로 향했다. 다행히 전기 자전거라 힘은 들지 않지만 녀석도 배터리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목적지는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으로 알려진 미후네야마 라쿠엔. 아쉽게도 봄 축제는 끝난 뒤였지만 입장료는 축제 기간에 받던 요금 그대로다.
미후네야마 라쿠엔, 어떤 여행지던 가장 좋은 시기, 가장 좋은 시간에 방문해야 한다.
좋지 않은 시기, 좋지 않은 시간에 방문하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작은 언덕을 향해 걷다가 쏜살같이 눈앞을 지나간 뱀 한 마리를 보고 깜짝 놀라 발길을 멈추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언덕에 오르니, 둥근 실뭉치처럼 생긴 꽃들이 펼쳐진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입구로 내려왔다.
여기서부터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다 닳고 비까지 내리다 보니 추워졌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가 조금씩 강해진다.
미후네야마 라쿠엔에서 왔던 길과는 달리 반대쪽 내리막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내리는 비 때문에 스마트폰을 거치할 수 없어 일단 가방에 넣었다. 혹시 몰라 화면의 밝기를 가장 낮게 설정했다. 배터리를 어떻게든 아낄 생각으로, 전원을 꺼둘까 하다가 혹시라도 방전되어 아예 전원이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일단 목적지는 다케오 온천역이다. 숙소 체크인까지 남은 시간을 활용해 다케오 시내를 둘러볼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비 피할 곳을 찾는 게 급선무다.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도시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불빛이라곤 편의점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이정표에 기준이 되어주는 다케오 온천역 방향으로 꽤 달려 멈춰 선 곳이 맥도날드였다. '아사맥 朝(あさ)マク'만 맥이 아니었다. 비를 쫄딱 맞고 생쥐가 된, 물론 모자가 있어서 걱정보다는 덜 젖었지만 옷가지는 많이 젖었다. 비 내리는 어느 늦은 봄날, 우산도 없이 찾아든 낯선 여행자의 방문에 잠시 집중되었던 눈길. 현지인들 몇 분이 식사 중인 맥도날드에, 그와 중에 자전거는 자전거 주차 공간에 잘 두어야 했기에 비를 더 맞았다.
따뜻한 120엔짜리 핫 커피를 마시니 몸이 녹는다. 반쯤 먹고 밀크와 설탕을 넣어 나만의 맥 라테로. 믹스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먹을만하다. 봄이지만 벚꽃 시즌이 지난 관계로 벚꽃 한정 메뉴도 맛볼 수는 없었다. 같은 소도시라고 해도 조금은 분위기가 다른 다케오 시. 도시의 느낌보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느낌이 더 강하다.
맥도날드 티슈로 자전거 안장을 닦아내고 다시 출발, 목적지인 다케오온천역까지는 가는 길이 쉬워서 어렵지 않게 돌아왔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보관해 주던 캐리어를 되찾아 다케오온천역 인근 료칸으로 걸어가는 길. 그 사이 비는 잦아들었다.
온천 여행의 '꽃'이라고 불리는 온천 식사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뭐 하나 잘 먹지 않고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먹는 식성 때문에 오마카세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메뉴다. 어릴 적 명절마다 큰 집 댁에 방문해서 다 같이 먹어야 하는 식사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낯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것. 어릴 적 떠난 조기 유학 시절, 홈스테이 맘(mom)이 만들어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생선 요리를 꾸역꾸역 먹어야 했던 일도 있다. 아무튼, 편의점에서 한 끼 해결을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으면 기분도 좋고 포만감도 느껴지는데...
아무튼, 온천 료칸에 와서 온천 요리를 먹지 않는 것은 언제부턴가 나에겐 당연해진 일이다. 료칸 주변을 빠르게 스캔하고 괜찮은 카페 한 곳을 발견했다. 구글 리뷰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침 일찍 영업을 시작하고 카레와 커피를 내어주는 조식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결코 아쉽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어 진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료칸 인근 동네 카페로, 전날 이미 봐둔 곳이기도 하고. 머무는 료칸에서 1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다. 카레와 커피, 사이즈는 하프, 노멀, 라지 중에서 하프로 주문했다.
주인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다.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아내는 카레와 음식을 준비한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 향긋한 커피 향이 나더니, 잠시 후엔 진한 카레향이 난다. 커피는 산미가 적고 구수한 맛이다. 음식이 나오는 사이, 테이블에 놓인 이벤트에 참여했다.
선물은 커피 드립백 하나.
공짜 선물이니 기분이 좋다.
카레는 야채 베이스로 다진 고기와 병아리콩, 야채, 계란이 들어간다. 드링크 세트로 주문하면 식사와 함께 또는 후식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휴대하고 다니던 카메라 메모리카드에 문제가 생겼다. 다케오 시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모두 날아갔다. 남은 것이라곤 휴대폰으로 찍은 몇 장. 휴대폰도 배터리가 없어서 제대로 찍은 게 별로 없다. 비록 남들에게 보여 줄 사진은 전부 날아갔지만, 나 혼자 간직한 추억이 될 사진은 핸드폰에 몇 장 남아있다.
손상된 메모리 카드 복구 프로그램 비용이, 10만 원이 넘는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진 까닭에 남은 사진도 별 의미가 없어졌다. 굳이 돈을 들여 사진들을 살려낼 필요가 아직까지는 없다. 대신 이렇게 핸드폰에 남은 몇 장의 사진과 다케오 여행 중 남긴 메모로 여행의 기억을 떠 올릴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 언젠가 손상된 메모리 카드를 복구하게 된다면, 조금 더 즐거운 여행 이야기를 더해보도록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