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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록출판사 Nov 27. 2023

[인터뷰] 김수진, 신주쿠양산박

2019년 5월 전화 인터뷰 /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사진: 김수진 제공]



김수진(金守珍, Kim SuJin)은 재일교포 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을 이끌고 있다. 김해 김 씨 양반가의 후손인 그의 아버지는 항상 집에서는 우리말만 쓰게 했으며, 언젠가 통일된 조국에 돌아가서 살 준비를 해야 한다 말씀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일 조국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살겠다는 의지로 전자공학과를 전공하기도 했다. 우연히 보게 된 연극 한 편이 그에게 연극인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고, 그는 반평생을 무대 위에서 보내게 된다.


그 후 일본 연극계의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蜷川幸雄)와 ‘카라주로’(唐十郎)에게 사사(師事) 받은 1987년 재일교포 극단 ‘신주쿠양산박’(年新宿梁山泊)을 창단한다. 그는 신주쿠양산박이 고영하는 모든 연극의 연출을 맡으며 일본과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89년 일본 극단과 협연한 한국 공연을 계기로 그는 한일 연극 교류의 선구자가 된다.


스승이었던 카라주로의 작품을 재해석한 작품을 공연하며 ‘일본 문화청 예술제상’을 수상하고 이 작품은 프랑스의 ‘아비뇽 연극제’에 공식 초청된다. 이를 계기로 세계 무대에 선 그는 호주 국립 연극학교(NIDA)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특별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현재 그와 신주쿠양산박은 한국을 비롯해 유럽과 중국, 호주, 미국, 브라질 등 전 세계적에서 국제적인 호평을 받으며 신주쿠양산박의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영화인으로서도 활동을 하며 인정받고 있는 그는 한일 공동 제작 영화 ‘밤을 걸고’(夜を賭けて)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스포니치 그랑프리’에서 신인상과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영화감독 협회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박열’의 제작에 지대한 공헌을 해 주목받기도 했던 신주쿠양산박의 김수진 단장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일본에서 ‘자이니치’(在日)로 살아온 그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눠봤다.


신주쿠양산박의 '新二都物語' 공연 [사진=김수진]


[김수진]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신주쿠양산박'이라는 연극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한국 매거진에서 이렇게 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지금은 재일교포 또는 재일동포라는 꼬리표를 달고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저는 김해 김 씨 집안에서 태어나 ‘경남 창원시 대산면 일동리 485’라는 본적을 갖고 있는 분명한 한국인입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저희 작은 아버지가 첨보 활동을 하다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장남이셨던 저희 아버님은 작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선산을 팔아 돈을 마련해 작은 아버지와 저희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도망치듯이 한국을 빠져나왔어요.


지금 그 선산의 반은 되찾았지만, 아버님은 당시 장남이 조상을 모신 선산을 팔았다는 것을 크나큰 마음의 짐으로 묻고 사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힘든 일본 생활 속에서도 저희 작은 아버지의 장남인 사촌 형을 와세다 대학원까지 보내실 정도로 교육열이 높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이토록 교육을 강조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가 다시 통일된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조총련계 조선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이 말씀을 항상 들어왔습니다.


영화 박열 예고편 캡처 [사진=유튜브 シネマトゥデイ]

[자이니치와 조센징의 경계]


조선학교에서는 한국 이름 석 자와 한복 저고리는 항상 일본 학생들로부터 차별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과 ‘일본인’은 저에게 분노의 대상이었고, 저는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가라테를 배워 일본인 학생들과 맞서기도 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일본인들의 괴롭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북한으로 가는 만경봉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으로 간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전해온 편지 속에는 하나같이 “병원과 학교가 모두 무료이며, 인민이 사회와 국가의 중심이라 선전했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전해왔고 감시와 통제하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은 다시 한번 큰 절망감에 사로잡혀야 했습니다.


“재일동포라고 하면 북(한) 쪽, 재일교포라고 하면 남(한) 쪽이라 생각하죠. 재일이라는 존재는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 그 자체입니다.”


당시 조선학교 학생은 일본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는데, 저는 일본 대학에 가기 위해 야간학교를 다니며 일본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저의, 이런 행동은 반대로 교포 사회에서 반감을 사게 됐고, 저는 일본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인들과 멀어져야 하는 아이러닉 한 삶을 살아야만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조선학교 출신의 친구가 꼭 봐야 할 연극이 있다고 하며 저에게 김지하 원작의 ‘진오귀’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연극을 보는 순간 그동안 제 마음속 깊이 쌓여있던 분노가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조센징’, 한국인에게는 ‘반쪽발이’로 불리던 저를 ‘진오귀굿’이 달래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주쿠양산박의 '도라지' 공연 [사진=김수진]


[김수진, 그리고 연극]


저는 이 연극 한 편으로 제 꿈을 바꿔버립니다. 돈 못 벌어도 좋으니 무대에 서고 싶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무작정 일본 연극계의 거장인 ‘니나가와’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니나가와 유키오에게 연극을 배우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제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에게 “무대 위에선 국적은 상관없다. 지금처럼 연기만 잘하면 된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단 한 가지 제가 저의 본명인 ‘김수진’이라는 이름으로는 제국극장 무대까지 설 수 없었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니나가와 스튜디오를 거쳐 일본 언더그라운드 연극의 대부 카라주로 스승님께 연극을 배우던 시절, 한 작품의 주제가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지 못한 5개월 때 낙태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한쪽 눈이 없거나 팔이 없거나 몸이 성치 않은 상태로 무대에 서죠. 저는 이 연극에서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 역시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과 조국, 두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낙태된 민족이라 생각했습니다.


1987년 드디어 저는 정의신, 김구미자 등 재일 한국인 연극인과 함께 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을 창단하게 됩니다. 극단 이름은 스승인 카라주로의 상황 극장이 있던 신주쿠와 ‘수호전(水滸傳)’에서 ‘송강’(松江) 등 108명의 호걸이 모여 농민봉기를 일으킨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지명인 양산박에서 따왔습니다.


창단 이래 30년 동안 신주쿠양산박은 연극을 통해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의 존재를 알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끔 저의 아내는 저에게 “ 김수진은 절대 귀화하면 안돼요. 일본 연극계에서 성공한 ‘재일 한국인’으로 남아야 해요”라 말하곤 합니다. 항상 저를 응원해 주는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신주쿠양산박의 '百年風の仲間たち' 공연 [사진=김수진]


[신주쿠양산박, 그리고 한국]


일본에서 극단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2년이 지날 무렵, 1989년 신주쿠양산박은 ‘재일교포 극단’으로 공연 허가를 받아 한국에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느꼈던 제 마음속 요동치는 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후 오태석, 노경식 등 한국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한·일 연극 교류에 이바지하며 재일교포 극단이 아닌 한일 연극 교류 극단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스승인 카라주로가 김지하 원작의 ‘금관의 예수’와 계엄령하 한국 취재를 바탕으로 쓴 ‘두 도시 이야기’를 서강대에서 공연해 한·일 연극 교류의 물꼬를 텄고 제자인 제가 이를 이어받아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왕십리역 앞 광장에 텐트극장을 설치하고 일주일간 오태석 원작의 ‘도라지’와 재일 한국인 100년 역사를 담은 ‘백 년, 바람의 동료들’ 두 편을 무대에 올려 뜨거운 호평을 받기도 했다.


‘도라지’와 ‘백 년, 바람의 동료들’ 두 작품 모두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무대 뒤 천막이 걷히면서 거대한 왕십리 역사(驛舍)가 무대 안으로 들어오고 무대 위 배우들은 극장 밖으로 나가 관객에게 다가가죠.


저희는 공연을 마친 텐트를 한국에 기증하고 갈 겁니다. 배우 김응수 씨를 수장으로 ‘종로 양산박’을 만들려 하고 있고요. 이 텐트가 한·일 연극인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주쿠양산박 텐트 공연 중 [사진=김수진]


[김수진, 신주쿠양산박]


저는 최근 개봉한 ‘박열’이란 작품으로 영화에 대한 희망을 보게 되었고, 현재 직접 연화를 제작하기 위한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영화의 소재는 동양의 아우슈비츠라 불렸던 ‘오무라 수용소’ 이야기입니다.


‘오무라 수용소’는 한마디로 일본으로 밀입국하려는 한국인을 체포해 수감하는 시설입니다. 이는 순전히 일본에서 해석해 발표한 ‘오무라 수용소’의 설명이며, 그 내막과 실체는 그들이 얘기한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당하게 되면 일단 남녀의 성별로 나뉘어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일본인으로 귀화해 모범적인 일본인이 되겠다는 맹세를 해야 만 나갈 수 있는 곳입니다.


현재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오무라 수용소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 오무라 수용소를 탈출하는 한국 인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만경봉호를 타고 북으로 건너갔던 한국인도 다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기도 했죠. 번역된 시나리오를 한국 영화 제작사에 전달해 진행 가능성 여부를 타진할 계획입니다.


연극은 현재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북한의 수장인 ‘김정은’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주제로 공연을 준비 중입니다. 올 가을에 대본이 완성되며 내년에 정식으로 무대에서 선보일 예정입니다.


신주쿠양산박 텐트 공연 실황 [사진=김수진]


[마지막 메시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인사 말씀을 드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오사카 대지진, 규슈 대지진에 이어 관동지방 대지진까지 일본은 지속적인 자연재해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30년 안에 다시 한번 거대한 지진이 올 것이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재해가 닥치면 그들은 우리 자이니치를 탓하고 원망하기 때문에 저희는 우리는 자연재해와 더불어 그들의 원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표면적 일본인은 친절하지만 그들은 집단성이 강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무섭게 바뀌어버립니다.


고베 대지진 때는 한국인 밀집지역만 불에 탔는데 그 이유는 황당했습니다. 불을 끄러 온 소방관들이 물이 없다며 그저 멍하니 서서 웃고 있는 영상을 뉴스에서 봤습니다. 당시 저는 너무나 경악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근거로 보면 지금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베는 절대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예전 일본이 꿈꾸었던 만주제국의 야욕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베의 선친이 꿈꾸었던 그 꿈을 아베가 이루어내야 한다는 야욕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일본은 사실 우리나라 고려인들이 건너가 만든 나라입니다. 일본의 천황도 백제 출신 가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나라와 신라 싸울 때 백제 사람들이 도망가 군대를 만들려고 건설한 나라가 바로 일본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근본적으로 서로 싸워서는 안 되는 민족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격렬한 논쟁과 싸움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자이니치, 재일교포라 불리는 우리가 있습니다. 저는 연극과 영화로 재일동포의 역사를 남기고 싶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또 북한에서도 그 어디에도 우리의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 재일교포는 아직도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상한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재일교포 문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신주쿠양산박의 '腰_おぼろ' 공연 [사진=김수진]


저는 개인적으로 순수한 재일교포 문화라는 것은 아직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창조적인 재일교포 문화를 우리 스스로가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일교포가 일본에 정착한 지 3세대가 이어지고 있으며 100년의 세월을 흘러 문화로 정착되어야 할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남한 아니면 북한, 아니면 일본 등 서로 국가와 지역을 나눠 각자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지만, 저는 이 모든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마치 우리의 전통음식인 ‘비빔밥’처럼 한데 어울려 혼합되는 문화로 자리 잡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뿌리를 숨기지 말고 다음 세대가 큰 차별 안 느끼도록 올바른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습니다. 지금 저의 아이들은 중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면 한국인이 될지, 일본인이 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죠. 저는 아이들이 한국인 국적을 택하길 바라고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고 이는 모두 아이들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쿄에 있는 김해 김 씨의 후손인 저희 아버님 묘지에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해 우리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조센진, 자이니치, 재일교포, 재일동포라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박열 일본어판 예고편



사용된 글과 인터뷰는 직접 취재/작성한 자료입니다. 브런치 저작권 규정 개정으로 근거자료 첨부합니다.

전화 인터뷰 후 김수진 선생님께서 작성해 전달주신 본인 소개서


김수진 선생님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하며 타이핑한 인터뷰 내용 원문 [사진=이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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