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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뷰리 Oct 25. 2023

흥망성쇠? [흥!행이 망!했다고 작품성!도 모르쇠?]

영화, 다음 소희

실적과 통계를 나타내는 수치 속에 우리 삶의 수많은 맥락과 결, 눈물과 웃음으로 굴곡진 우리네 이야기들이 매몰되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영영 이름을 잃게 된다. 우리 모두는 그저 통계 수치 중 분모의 합을 이루는 숫자 1에 지나지 않게 되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울퉁불퉁 매우 입체적인 인간을 균일/납작하게 만드는 이 잔인한 프로세스가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 낯익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가끔 유의미하고 특별해보이는 분자의 위치에 오르는 게 로또를 맞은 양 크게 흥분할 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쉴새없는 산식이 행해지면서 분자의 숫자들은 순식간에 계속 다른 숫자들로 교체되고 만다.


영화 <다음 소희>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이 다른 누구의 이름으로 쉽사리 대체될 수 있음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닫게 된 한 여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017년 전주 콜센터 여고생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성과주의와 무한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아니 그냥 시달리게끔 관성에 젖어 아무 것도 안하는 '무사유'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줄 세우기 경쟁에서 모두가 극도로 피곤하고 힘들지만, 아무 보호 장치 없이  이 트랙 위에 서서 영문도 모른 채 쫓기듯 질주하게 된 아이들이 넘어지고 쓰러져 나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가장 약자이기 쉬운 사람들, 특히 가난한 계층의 아이들이 손쉬운 착취와 약탈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짓을 하는 천하의 못된 놈들 처단이 필요치 않은가? 이 영화의 구성 중 2부라고 볼 수 있는 형사 유진의 이야기는 그런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범인 때려잡는 형사의 등장으로, 소희의 자살이 어찌보면 타살과 다를 바 없음을 밝히며 그 주범을 응징해 줄 사이다 전개를 내심 바라게 된. 하지만 그건 사실 관객 맘  편하라고, 잠깐 끓어오른 분노와 복수심을 시적 정의 구현으로 가라앉혀 달래고 이 세상 문제가 순간 잘 해결된 것처럼 속이고 알면서도 속아 주는 영화 소비 방식일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를 아주 자유롭게 할 수는 없지만, 형사가 주인공이 된 2부는 실화에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부분이다. 관객 비위 맞추자면 까짓거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기대감과 만족감이 애시당초 잘못됐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언젠가 소희와 마주치고 스쳐 지나갔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사람, 유진에게 일부러 범인 잡는 형사의 옷을 입혔다.


유진이 형사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히고 할 수 없는 불능 상태임을 영화 후반부는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유진이 사건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전화상담사 착취/관리 콜센터와 그 뒤에 있는 대기업, 이와 결탁하여 미성년 아이들의 노동력을 후려치며 싼값으로 상납하는 실업계 고등학교, 이를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교육청, 또 그 위 교육부 등이 소희 사건에 다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는 된다. 하지만 특정 개인을 단죄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그저 확인하게 될 뿐이다. 현 사법체제로는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고, '다음 소희'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정의감에 불타고 집요하게 진실을 좇더라도 형사로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유진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정의가 구현될 가능성이 차단되고만 이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영화가 유진의 불능과 무력, 그리고 좌절로만 끝을 맺었어도, 실화의 힘을 가지기도 했거니와 관객에게 다소 불편하지만 솔직한 대화를 건네는 영화니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진은 '형사'의 역할에만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형사보다 마치 탐정처럼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혀 나갔고 진실을 대면한 이후 한 인간이자 이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소희를 다시 바라본다. 실업고 취업률과 상담실적 순위 등 숫자로만 말해지던 아무개 누구가 아니라, 춤을 잘 춰서가 아니라 마냥 춤이 좋았던 소희를, 가난한 부모라 자녀의 세세한 어려움을 모르거나 때론 못본 체 하기도 했지만 그 아이의 이름을 너무 소중히 여겨 '소이[희] 패션'이라는 업체명을 내걸고 그 이름이 박힌 트럭을 몰며 도매옷 바쁘게 떼다 팔던 아버지의 귀한 딸 소희를, 친구들 앞에서는 명랑하며 센 척도 잘했지만 한 겨울 시린 발로 시린 마음을 위태롭게 드러내던 소희를, 그렇게 한 사람 소희로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행적을 찾아 보며 유진은 웃기도 하고 때론 울기도 했다. 죽은 소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따듯한 시선으로 소희를 다시 바라보게 된 유진은 '다음 소희'가 되어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이전처럼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게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건넨다.


유진의 이러한 변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었다. 구조적 문제 앞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울퉁불퉁 입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시선의 변화는 결국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변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런 시선들이 늘어나고 연대하기 시작한다면, "막을 수 있었잖아"라고 뜨겁게 외치던 유진의 목소리에 우리 소리를 더 해 큰 외침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실 2017년 전주 콜센터 사건 이후에도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현장실습생 부당 대우 문제는 여지없이 반복되었고 수많은 '다음 소희'들이 있었다. 올해 이 영화의 개봉으로 인해 사회적 반향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국회에서 '다음 소희 방지법'이 통과되고 시행될 수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법이 만들어진 건 다행이다. 그렇다고 전주의 홍수연이 홍수연이라는 이름으로, 제주 서귀포의 이민호가 이민호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회로 당장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그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세상을 향한 눈을 바로 뜨기  위한 투쟁에 지치지 않을 우리의 존재가 선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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