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틀 그리고 햄버거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해도,
하필 우연에 우연이 겹쳐 여러 원인들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날이었다 해도,
내 아이들이 브레이크 없는 경주용 자동차처럼 음식점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보는 건
정말이지 이산화탄소로만 이루어진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아침부터 모든 게 완벽했는데.'
늦가을, 따스한 햇살이 감도는 어느 날,
가까운 근교에 딱 걷기 좋은 저수지 옆 데크길을 걸으러 갔다.
흔들흔들 출렁다리를 건너도 보고, 달달한 설탕가루가 묻은 핫도그도 맛있게 먹고,
작은 놀이터에서 땀이 날 정도로 신나게 뛰어놀았다.
'아, 행복하다.'
잠깐이지만 완벽한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누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자장면 맛집 앞에 도착한 순간.
✋재료 소진으로 인해 준비 중입니다.
빛의 속도로 남편의 눈치가 보였다.
항상 덜렁거리고 빠뜨리는 건 나만의 고유 영역이었기에 오늘도 역시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데려왔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이런 순간엔 특히 더 움츠러든다.
그래도 나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아까 찾아봤던 블로그 글을 한 줄 한 줄 다시 들여다봤다.
어디에도 브레이크 타임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알겠어. 내가 뭐라고 안 했잖아?"
쿨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황급히 옆 버거 가게로 들어갔다.
수제버거 가게의 블로그 평은 칭찬 일색이었다.
�인생 버거라 불릴 만하다. 시골에서 이런 버거가 나올 줄이야!!!
'휴, 오늘을 성공으로 마무리할 마지막 기회가 아직 남아 있구나.'
아이들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버거와 함께 시키려던 파스타는 이미 품절이다.
'아니야, 괜찮아. 아이들이 버거를 잘 먹어주겠지.'
야외에 넓고 한산해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야외 테이블에는 한 팀이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속삭였다.
“옆에 있는 아저씨가 뭐라 했는지 알아? ‘이 집의 평화도 이제 끝이겠구나…’ 하더라. 우리 애들 보면서.”
처음엔 그냥 웃어넘기려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 주려고 시킨 버거의 소스가 너무 매워서 어른인 나도 먹기 힘들었다.
결국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건 감자튀김뿐이었다.
짜디짠 감자튀김만 먹고 황급히 일어난 아이들.
처음엔 주변을 살피며 살살 걷기 시작하더니, 이내 잡기 놀이가 시작됐다.
신발을 벗고 가게 밖 간이 테이블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장난을 쳤다.
"그만해. 앉아 있어!"
"여기 식당이야. 테이블에 앉아서 놀자."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너희 때문에 불편해하잖아. 너희도 위험해. 이제 그만해야 해."
그 뒤에도 무수히 많은 말들을 하며, 신랑과 나는 남아 있는 음식을 아쉬운 대로 서둘러 입에 밀어 넣었다.
눈은 아이들을 주시하고,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접시를 비우는 데만 의미를 둔 질 낮은 식사를 겨우 끝마쳤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나의 어떤 말도 아이들에겐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외국어처럼 하나도 들리지 않았으리라는 것.
아이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첫째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며 터진 울음과 함께 그 난리가 끝이 났다.
화가 났다.
옆 테이블에서 평화를 운운하던 아저씨의 말대로 우리가 이 가게의 평화를 깬 게 너무도 확실했다.
평생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살아왔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문득 방금 놀이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미끄럼틀도 다양한 방법으로 타며 아이들은 세상 재밌게 땀을 뻘뻘 흘리며 놀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고 있을 때,
같이 놀이터에 있던 한 아이가 모래를 손으로 만지자 아이의 엄마가 호되게 혼을 내며 말했다.
"엄마가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했지!"
또 어떤 아이가 순서대로 타는 놀이기구에서 좀 천천히 일어나자, 엄마가 바로 한마디 하셨고, 그 아이는 즉시
"엄마,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친구들아 미안해. 내가 좀 느리니까 먼저 지나가."
너무나 자동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아이를 보며, 그게 그렇게 죄송할 일인가 싶었다.
우리 사회가, 학교가, 가정이 아이들을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학교는 통제를 기반으로 교육하고,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리는 아이들을 통제해야만 안심이 되는 것 아닐까.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조율하는 태도가 오히려 아이들이 스스로 갈등을 겪고 고민하고 해결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 않은가.
오전 시간 놀이터에서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는데,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통제가 전혀 되지 않는 야생마 같은 우리 아이들을 보며 나는 더 겸손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모두 아이들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다.
또한 통제보다 자율성을 존중하는 나의 교육관이 잘못되었다고 섣불리 결론짓고 싶지도 않다.
아이들도 나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나의 교육관은 확고하다.
아이들이 타고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자율성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는 것.
다만, 예의와 자율성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장소에 맞는 예의와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에 대해선 끊임없이 가르치고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자율성이 허락하는 시간, 스스로 갈등을 겪고 조율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며 끊임없이 통제와 자율 사이의 팽팽한 줄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 노력한다.
어떤 부모는 통제에 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어떤 부모는 자율에 좀 더 가까이 서 있을 수도 있다.
부모가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나는 이 시대의 우리 아이들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펼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