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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포레스트 Nov 11. 2024

당신은 취향이 있습니까?

무색무취의 사람



 "취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내 취향을 땅 속 깊이에 묻어두고 딸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살아왔다. 솔직히 그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마주하는 것조차도 두려워서, 항상 내 진짜 속마음 위에 '괜찮다'는 이불을 층층이 덮어씌운 채 살아왔다. 


내가 잘 버티지 않으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고, 실제 그럴 때도 참 많았다.


그런 내가, 기나긴 세월 속에서 묵묵히 버텨온 나 자신을 위해 결혼 전에 일상처럼 떠나던 여행을 다시 가겠노라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작년 여름, 29살 찬란하던 그 때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던 친구와 다시 만났다. 


 "그래, 다음에 꼭 여행 가자."


라고 말하는 순간, 커다랗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마음을 쿡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날 나와 친구는 결심했다. 


"우리 인생에 다음은 없어. 바로 날을 잡자!" 


그리고 2024년 1월, 각각 아이 둘과 남편을 뒤로하고 친구와 나는 발리로 6박 7일간 여행을 떠났다. 이 시간은 그동안 방전되었던 내 인생의 배터리가 풀충전되는 시간이었다.


비현실적인 발리의 석양


멍하니 드넓은 대양에 물감처럼 번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중간에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잘 수 있다는 것, 듬뿍 담긴 루꼴라 샐러드의 쌉싸름함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을 수 있다는 것... 이런 순간 순간들이 마음 깊숙한 빈 구멍을 하나씩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잊을 수가 없다.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요즘 어떤 음악 들어? 플레이리스트가 뭐야?" 


순간 머릿속이 뎅— 하고 울렸다. 


"나... 음악 안 들은 지 오래됐는데?"


라고 답하며 스스로도 속상하고 부끄러웠다. 분명 한 때 음악을 열렬히 사랑했던 나였는데, 어느새 좋아하는 곡 하나 없는 삭막한 삶을 살고 있었다. 오히려 로봇이 나오는 만화의 주제가가 입에 맴도는 웃픈 현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취향을 챙기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했었다. 취향을 떠올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던 삭막한 시간들이었으니까.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을 물어본 그 순간 이후로  발리에서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취향'이라는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하나씩 찾아보기로 했다. 마치 죽어 있던 불씨를 가까스로 살리듯이 아주 작은 것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쌉싸래한 루꼴라, 돌고래, 톤 다운된 색감들(엄마는 늘 "왜 이렇게 낡아 보이는 옷만 사냐" 하셨지), 시트러스 향, 천천히 음미하는 식사, 해질녘의 고요, 노을빛, 라틴 음악, 초록색, 첼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

내 사랑 돌고래


좋아하는 것들에 하나씩 마음을 기울이자 그동안 일상에 묻혀 있던 나의 취향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리 여행을 계기로 깨달은 가장 큰 수확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삶'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움트게 해준 순간이 바로 발리여행이었지않나 생각한다. 취향에 대한 작은 물음표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이 취향 찾기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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