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예민자
"아니요, 따님은 무던하지 않을걸요. 엄청 예민한 편일 텐데?"
고등학교 2학년 때, 5살 무렵부터 앓아온 아토피 증상이 절정에 달했다. 앉아서 공부에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집 근처에 있던 옛날부터 유명한 한약방을 찾아가 진맥을 받고 약을 지어오기로 했다.
한약방 아저씨가 진맥을 하시며 엄마에게 내 성향이 어떤지를 물었다. 엄마는 내가 세상 무던하고 잘 참고 성격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평생 무던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그렇게 들어왔고, 그걸 듣다 보니 더 강화가 된 것 같다. 지금까지 부모님과도, 격정의 시기를 보낸 동생과도 별다른 충돌이 없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기면 양쪽의 입장을 중재하는 메신저 역할을 주로 했다.
솔직히 갈등 상황에서 느끼는 불편함보다는 내가 참고 넘어갈 때의 평화로움이 더 편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거나, 모두가 좋아할 만한 선택을 내가 알아서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상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충분히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화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 그게 아니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내 안에 화가 이렇게나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신기한 건 신랑도 자기는 평생 화를 낼 일이 없는 사람인데 결혼하고 나서는 그렇게 화가 많이 났다고 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면서 둘이 웃음이 빵 터졌었다.
둘 다 엄청 서로에게 화내고 나서 겨우 화해한 뒤에 이 얘기가 나왔었기 때문이다(신혼 시절 이야기 :>)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는 더욱 놀라운 비밀을 마주하기도 했다. 바로 내 안에는 엄청난 괴물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단순한 화가 아니라, 마치 지구 깊은 곳에서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마그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라?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네?
이전까지는 신랑이 잘못했거나 문제의 원인이 대부분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는 극도로 예민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넘기면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사람.
이것이 바로 HSP (Highly Sensitive Person), 예민한 사람의 특성이었다.
나는 무던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정한 순간부터 나의 세상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든 관계와 삶,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