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
1984년 만우절.
엄마는 거짓말같이 결혼식을 올렸고
딱 3년만 고생하자던 말이 무색하게 그날부터 지금까지도 가장의 역할을 놓지 못하고 있다.
아빠는 8남매 중 장남으로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운동신경 등으로 가난했던 그 시절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다 받으셨다. 하지만 아빠는 18살의 어느 날, 집안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출가하는 길이라며 큰 뜻을 세우고 절로 가버리셨다. 할머니의 설득에 결국 돌아와 훗날 엄마와 결혼도 하셨지만 평생 돈을 좇지 않는 삶을 추구하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괄시했던 돈이란 놈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 힘들어하셨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 대신에 살림과 생업 등 거의 모든 것에서 홀로 앞장서야 했다.
신랑 또한 명석한 두뇌로 학교생활에서 두각을 드러냈었고 첫 번째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군대를 다녀와 반수만에 한의대를 합격하였다. 6년 과정을 5년 만에 끝내고 한의원에서 일하던 나의 남자친구는 어느 날 돌연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을 바로 직전에 앞두고... 결국 의대에 진학하여 현재 세 번째 대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나는 결혼과 동시에 수험생의 아내가 되었고 지금까지 학생의 아내로 살고 있다. 사랑스러운 두 아들과 함께.
처음엔 가정환경이 참 비슷하다고만 생각했었다.
어머니와 아버님과의 관계,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지만 불안정했던 가정 경제.
1980-90년대를 지나온 우리 세대의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한 면들이 많았기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아빠는 남편이 한 번씩 아이를 키워내야 할 공동의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전혀 걸맞지 않은 행동들을 할 때도 이상하리만치 넓은 마음으로 그를 이해해주시곤 했다. 신랑도 아빠가 하시는 행동을 보고 나보다 그를 더 이해할 때가 많았다.
사실 아빠는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남편으로서의 롤모델이었다.
나의 무의식은 어쩌면 엄마가 살아온 것처럼 똑같이 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해 준 게 아닐까 싶다.
남편의 무의식 또한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님과 똑같이 살기 위해 찾고 찾고 또 찾아 나를 선택한 게 아닐까.
양육의 대물림...
해결되지 않은 엄마와 아빠, 어머니와 아버님의 상처와 결핍은 고스란히 나와 남편의 무의식에 저장되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물려받은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가장 잘 건드려줄 수 있는 사람이 서로였음을.
하지만 이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린 천생연분이다.
양육의 대물림으로 어쩔 수 없이 엮인 사이가 아니라
서로의 무의식에게 간택받은 소중한 인연이다.
이 감사한 인연 덕분에 나의 상처와 결핍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상처와 결핍을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할 때 양육의 대물림은 끊어지게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와 남편의 깊은 상처와 결핍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다행히 남편 또한 이 모든 것에 동의해 주었다.
뒤로 갈지언정 결국은 앞을 향해 꾸준히 내딛는 삶
상대방을 탓하고 환경을 욕하기보다는
자신을 바라보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삶
우리는 오늘도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