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성리 성두마을 우리 아버지의 고향 나의 본가 내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
하동, 지금의 하동은 꽤 유명해졌다.
푸르름 친환경 녹차 쌍계사 화개장터 소설 토지의 무대 많은 관광지 볼거리가 생겼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내 어릴 적 하동과 정반대의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어릴 적 하동은 자연 그 자체였다.
하동 IC를 지나 우회전을 하면 꼬불꼬불 동네를 감아도는 길들이 굽이굽이 나타난다. 그 길을 한 시간 넘게 달리다 보면 하동터미널이 있는 읍내가 나온다. 완전 깡시골 하동에서 제일 큰 시장이 있는 곳이다. 부모님은 이곳에서 못다 본 장을 봐서 할아버지 할머니댁으로 가셨다. 하동읍내에서 또 굽이굽이 섬진강 따라 길을 30여분 가다 보면 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도로가 나타난다. 감나무가 많이 보일수록 할아버지 할머니댁이 가까워온다. 좁은 도로를 달리다가 오른편 교회 십자가가 보이면 곧이어 성두마을이라는 비석이 보인다. 거기서 우회전! 드디어 마을 초입구에 들어선다. 성두마을! 우리 아버지께서 자라신 동네 내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골마을 마을 곳곳마다 추억과 기억들이 공존하는 곳!
좁은 시골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소똥이 너저분하게 길가에 널려있고 외양간 틈사이로 누런 황소가 보인다. 조금 더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에 길고 긴 양궁장이 보인다. 나도 양궁 한번 쏴볼까? 생각만 하다 이내 방향을 돌린다. 마을 곳곳에는 귀농한 도시 어르신들이 터를 잡고 계신다. 이렇게 깊고 깊은 시골에 왜 들어오신 걸까?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싱그러운 공기 푸른 나무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값비싼 보약을 마시는 기분이다. 이제 평지가 나온다. 오른쪽 저 멀리 성두마을을 상징하는 나무가 보인다. 족히 500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 우리는 그곳을 농징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모른다. 어른들이 농징이라고 불러 우리도 따라 불렀다. 나무 가지마다 새겨놓은 이름들, 아마도 짝짝이 적어둔 이름들은 그 언젠가 서로 애정하던 이름이 아니었나 생각했던 적이 있다. 또다시 평지를 따라 길을 가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보리밭,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저곳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마음에든 우리 엄마는 사진을 크게 인화해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두었다. 우리는 그 사진을 오랫동안 보며 지냈다. 그리고 그 액자가 언제 치워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더 그 평지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살구색깔 낮은 건물이 나오는데 그곳이 마을회관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종종 놀러다니시던 사랑방 같은 곳이다. 명절이면 마을회관 앞마당에 모두 모여 노래자랑을 열곤 했다. 이날만큼은 결혼하며 달고 살던 이름표 다 집어던지고 나는 가수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노래를 뽐내며 새벽까지 어울려 놀았다. 누구 집 며느리 노래 잘하더라 누구 집 아들 춤 잘 추더라. 자랑의 자랑이 칭찬의 칭찬이 넘쳐나던 그때, 그때가 그리워진다. 마을회관을 지나 비탈길을 내려오다 보면 길고 긴 냇가가 보인다. 지금으로 치면 집 앞 냇가는 프라이빗한 수영장인셈이다. 큰 돌 작은 돌 사이사이 시원하고 맑은 산물이 흐른다. 큰 돌 하나 골라 앉아 시원한 냇가물에 발을 담그면 에어컨보다 더 시원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 내 어릴 적 추억의 워터파크이자 프라이빗한 수영장이었다. 냇가를 돌아 다시 비탈길을 오르면 드디어 할아버지 할머니댁이 나온다. 2층 창고가 입구에서 보이고 입구 오른쪽에는 화장실과 외양간이 보인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기르시고 농사에 사용하신 황소 한 마리가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어느 추운 겨울 1월 1일, 뜨뜻한 아랫목자리를 서로 앉겠다고 엉덩이를 밀고 있던 그때 유난히 황소의 울음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사촌동생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황소가 출산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끙끙 해산의 고통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던 황소는 길게 목놓아 울더니 툭! 하고 바닥으로 큰 덩어리가 떨어진다. 핏덩이의 아기송아지가 태어났다. 송아지 몸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소는 부지런히 송아지의 몸을 핥아주었다. 잠시 후 송아지가 가녀린 다리로 비틀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하얀 눈이 온마을 덮고 있던 그날 흰 눈 같이 눈부신 귀여운 송아지가 태어났다. 사람은 태어나서 걷는 데까지 1년이 걸리는데 송아지는 단 몇 분 만에 걷다니 놀라웠다. 늘 조용하시던 할아버지는 그날 태어난 송아지를 보시고 무척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할아버지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외양간을 지나 마당 앞에 서면 큰 기와집이 나온다.
본래는 초가집이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부지런히 농사지으셔서 지으신 의미 깊은 집이다. 방 3칸 부엌 1칸 2층창고 고방(음식창고) 지금으로 비교하면 신축아파트! 예나 지금이나 집에 마음을 쓰는 건 비슷한 것 같다. 할머니가 아끼시던 부엌, 아궁이 2개 대나무로 짜 넣은 큰 선반 그리고 아궁이 뒤로 쌓여있는 땔감나무 한가득, 할머니는 부엌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셨다. 부지런히 닦고 치우고 요리하며 이곳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내셨겠지.
부지런해야만 먹고살았던 시절을 보내신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은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부지런을 떨어야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다. 인덕션 대신 나무를 해와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고 가스보일러로 금방 데운 따뜻한 물 대신 아궁이에 물을 데워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용해야 했다. 세탁기건조기 대신 차가운 냇가의 얼음물을 깨서 녹여가며 빨래판에 빨래방망이 세탁비누로 열심히 빨아 노동의 대가로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너무 편리 해진 시대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동의 대가로 오는 건강함이 필요한 요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 더욱더 나의 시골풍경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