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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Feb 19. 2024

젖소 잠옷 입고 열정 더하기

직장을 그만두고 해장국 장사를 할 때 직장에서 막 퇴근한 샐러리맨들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웃고 떠들어 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문득문득 얼마 전까지 그 들과 같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에 빠져들곤 했다. 

     

어버이날에 큰 딸아이가 작은 소망을 담아 쓴 편지 글귀 끝에 매달렸던...  

“아빠가 넥타이 맨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요.” 

글을 읽고서 한동안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늘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항하지는 않겠지만 그동안 나에게는 유난히도 사나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건너가는 듯한 삶이 연속됐다.      

가족의 생계와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얼마 전까지 가졌던 그럴듯한 핑계의 자존심은 이미 엷어졌다. 

그러고는 직장을 찾아 헤맬 때 속된 말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전 직장인 신협이 떠올랐다. 


“신협에 다시 돌아올 수 있나?”


선배의 제안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선배가 소개한 신협은 업무를 총괄하는 실무책임자가 필요했었는데 나 말고도 금융권 경력이 있는 여러 사람이 추천되어 있었다. 

그동안 구직을 위해 전국경제인연합회 재취업 프로그램에서 이력서와 경력기술서 작성요령을 배운 덕택에 지원서류를 잘 작성했고 면접 전형을 통해 최종적으로 실무책임자로 채용됐다. 

다시 일하게 된 신협은 재무구조는 양호하지는 않아서 부담도 있었지만 다시 넥타이를 매게 되었다는 기쁨이 앞섰다.      


드디어 새해를 맞아 업무가 시작되는 첫날 시무식에 맞춰 출근하게 되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전 직원이 함께하는 시무식에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내가 사는 인천에서 아침 7시까지 서울로 출근하려면 새벽에 출발하는 첫 지하철을 타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는 흐뭇한 마음에 신선한 새벽 공기를 흠뻑 들여 마셨다. 


그리고는 새벽 어둠속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축하를 받으며 벅찬 마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버스와 지하철을 옮겨 타며 해뜨기 전 여명 속에 서울을 품은 한강 다리를 건너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그렇지만 나의 새로운 마음가짐과 달리 처음 만나게 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며칠 동안 업무를 파악하면서 어색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전에 신협의 업무를 감독했던 경험을 굳이 들춰내지 않더라도 업무상 익숙해 왔던 동물적인 감각에서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게 되었다.      


직원들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아 보였고 최고 결정권을 가진 이사장이 독점적 권한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부하직원인 지점장은 내가 있는 본점에 결재를 받으러 오면 나에게 먼저 결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사장실에 먼저 들어가서는 문을 닫은 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내가 이제 막 실무책임자로 부임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라며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거듭된 상황에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엄습해 왔다.      


업무를 파악하며 규정과 제도 개선으로 우선 직원들의 불안한 계약직의 급여를 호봉제로 전환하고 복리후생 제도를 보완해 나가면서 직원들과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했다. 

직원들이 나에 대한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면서 몇몇 직원이 면담을 요청해 왔다.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희망 속에 푸르름이 가득해야 할 직장의 분위기가 왜 어두운 암갈색을 띠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다시 넥타이를 맬 수 있도록 나를 채용한 이사장의 무리한 업무 상황을 직원들에게 듣고는 넥타이를 다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넥타이를 매었다가 풀었다가를 고민하기 전에 직원들의 불안한 상황을 해결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해결 방법을 찾으려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감독기구에서 정기감사가 시작되었다. 


금융업무와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이 법과 규정에 틀에 벗어난 일들이 밟혀지고 이사장은 자진사퇴 하게 되었다.      

폭풍이 몰아치듯 긴박한 상황이 지나면서 새로운 이사장이 선임되고 평화로운 일상에 접어드는 듯했다. 

지역주민을 상대하는 신협이었지만 성당을 뿌리로 시작해서 성당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성당에서 중책을 맡았던 전임 이사장이 임기 중에 그만두게 된 것이 큰 파장이 되었고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모함해서 이사장을 몰아냈다며 신협이 불안하니 예금을 빼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신협에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벌어진 엄청남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우선 사람들 사이에 불길처럼 번져가는 악성 루머를 차단하기 위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당의 심신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에 가입해서 퇴근 후에 성당 신자들과 모임을 통해 어울리면서 신뢰를 쌓아 나갔다.      

첫 출근 날 여명에 비친 한강을 보면서 이곳 직장을 마지막 직장으로 삼자며 마음속에 담아놓은 각오를 되새겼던 기억으로 지금은 오로지 직장에 올인한다는 마음을 굳게 가졌다. 


성당에서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 활동을 넓혀나가면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믿음을 심기 위해 사무실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혼자 산다는 것이 불편하지만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직장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나섰다.      

먼저 신협의 모태가 된 성당의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협의 안전성을 알려 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협에 대한 악성 루머는 서서히 사그라졌으나 재무상태는 적신호가 켜지고 있었다. 


신협의 경영평가 기준이 되는 순자본비율이 낮아지고 있어서 재무상태 악화되어 위기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건실한 재무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완자본을 확충해서 순자본비율을 높여야만 했다.  

우선 직원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조합원들을 설득할 수 있기에 직원들에게 우리 신협의 재무상황을 이해시키고 자발적인 협조를 구했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조합원들의 협조로 몇 해를 넘기며 조성한 보완자본으로 위기를 잘 넘기고 건실한 재무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하루하루 긴박한 상황에서도 예전에 제주도에서 혼자 살던 기억을 잊지 않고 시간의 여유를 잘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과 관계된 일들로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과 저녁 자리를 갖다 보니 건강도 걱정이 되어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규칙을 정했다. 

마침 자취방 근처 초등학교 스포츠센터에 실내수영장이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수영으로 하루를 여는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나의 몸과 마음을 일깨우며 직장의 건실한 재무구조를 만들어 가면서 직원들의 올바른 주인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독서를 통해서 서로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조를 짜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북 콘서트를 시작했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지식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와의 소통과 공감을 나누었다.   

한편으로 지역주민과 인근 직장인들에게 금융 거래를 유도하기 위해 평범하지 않은 홍보 활동을 시도했다. 

직원들에게 좋아하는 동물을 고르라고 하고 호랑이, 토끼, 곰, 젖소, 얼룩말, 원숭이, 캥거루, 펭귄 등 동물 캐릭터 잠옷을 입고 거리로 나가자고 했다. 


직원들은 선뜻 내키지 않은 듯 주저했지만 내가 먼저 젖소 잠옷을 입고 나서자 잠시의 망설임을 털어내고 좋아한 동물 잠옷을 하나둘씩 입기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을 ‘홍보의 날’로 정하고 업무를 마치고 전 직원이 모여서 홍보 전단지와 판촉 기념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길가에 오가는 사람들은 동물 캐릭터 잠옷을 입은 우리의 모습이 신기한 듯 잠시 멈추어서 무엇을 홍보하나 궁금해서 물어보기도 하며 관심을 보였다. 


동물 잠옷을 입고 어색해하던 직원들도 이내 직장을 위한 홍보 활동에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을 내었다. 

저녁에 주로 했던 홍보 활동을 이른 아침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 펼치기로 하고 아침 7시에 수천 명이 쏟아져 나오는 지하철 출구에서 동물 잠옷을 입고 홍보 전단지와 캔커피를 나누어 주면서 홍보 활동을 이어나갔다.   

출근길 직장인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우리들의 모습을 힐긋힐긋 보면서 손에 받아 든 홍보 전단지를 읽고 있었다. 


이러한 홍보 활동은 단시간에 효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내 직장의 건실한 발전을 위해 어색함이나 망설임을 떨쳐내고 올바른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지금 같으면 직원들의 자발적 참여 의사 없이 그런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새로움을 찾아 시도하고 도전하는 내 생각은 늘 한결같다. 

도전하는 삶 속에 내일이 있듯이 언제나 새로운 도전은 나에게 늘 설렘을 주고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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