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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Jul 30. 2023

번역본색 5

외래어 표기 문제, '찌루찌루'의 파랑새라고?

어릴 적 즐겨 듣던 동요 중에는 ‘파란 나라’가 있었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하고 시작하다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알델센도 알고요” 하는 가사가 나온다. 어릴 적에 들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보니 ‘알델센’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찌루찌루’는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인 Tyltyl과 Mytyl 남매를 두고 각각 찌루찌루와 미찌루라고 번역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썼는데 지금은 ‘틸틸’과 ‘미틸’이 되기는 했지만 바뀌는 중간과정(?)에서 그들은 ‘치르치르’와 ‘미치르’였다. 부연할 필요 없이 일본어 번역의 흔적이며 번역본색 첫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번역의 실태가 미흡하기 이를 데 없었기에 일본어로 번역된 작품들을 중역하는데서 발음 표기마저 거의 그대로 옮겨 쓰다 보니 어린이들이 읽고 듣는 동화마저도 저 모양이었던 것. 교육에 대한 열의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라면 둘째 가기 어려울 우리나라가 교육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어린이 동화에는 이렇게 버젓이 일본식 어투와 발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 비관하는 건 아닌가도 싶지만 나는 ‘엑기스,’ ‘공구리,’ ‘후루꾸’ 등과 같은 단어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가능성보다 우리네 인류가 기후 위기나 바이러스 등과 같은 재난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물론 일본식 표기만 문제 되는 건 아니다. 동화를 언급한 김에 일관성을 지니려면 <플랜더스의 개>도 짚을 필요가 있다. ‘플랜더스’는 일본식 표기는 아니지만 영어식 표기라서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굳이 영어식으로 쓸 필요는 없어서다. ‘플랜더스’는 벨기에의 지방 Vleanderen을 가리키는데 마땅히 벨기에식 원음을 살려 ‘블렌데렌’이라 쓰면 된다. 해당 국가의 원음을 최대한 살려 표기하는 건 번역에서는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므로 그동안의 한국어 관습과 한국인들의 문화나 정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 일본식 표기는 일본이라는 이유로 걷어내면서 영어식은 괜찮고, 그러다 또 어떤 영어식 표기는 이건 좀 너무하다 싶어 빼고 하는 식이면 번역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번역서에서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한국어 단행본에서도 책의 일러두기에 “외래어 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 원칙에 따르되, 실제 발음을 고려한 경우도 있다”라고 보통 명시하는데 그 실제 발음이 애매하거나 여의치 않은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국립국어원은 이런 부분들을 마땅히 명기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의 표기 원칙부터가 전혀 일관적이지를 않으니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적이 어제오늘 있었던 게 아닌 만큼 국립국어원도 고충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고 지금까지의 노고도 응당 인정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불만이 남는 건 나만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기왕 볼멘소리를 한 김에 하나만 더 하자면 외래어 표기에 앞서 어떤 외국어든 한국어로 번역 가능한 것들은 외래어 표기를 따질 것도 없이 당연히 한국어로 써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브런치 스토리’도 실은 상당히 불만이다. 지금 같은 폭염에도 제대로 못 쉬고 밖에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다 잠깐씩이라도 짬을 내어 먹는 음식을 ‘새참’이라 하고 그 잠깐 쉬는 동안을 ‘참’이라 한다. ‘어울리다’는 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래서 ‘브런치’는 ‘어울참’으로 쓰도록 이미 국립국어원에서 권장한 바도 있는데 별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고, 대신에 ‘아점’이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쓰인 것 같다. ‘브런치 스토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울참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여태껏 사람들 마음을 잡는 글 하나 제대로 못 쓴 건가도 싶지만 불만은 불만이다.     


여하튼 다시 번역 이야기로 돌아가서 저렇게 떠들기는 했어도 지명이나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를 제대로 표기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런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로 이름 날렸던 Georg Solti는 게오르그 솔티로 굳어지긴 했지만 검색하다 보면 숄티, 쇨티, 쏠티, 쐴티와 같은 표기도 어렵지 않게 보인다. 흥미로운 건 이게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미국에서도 그의 이름은 영어로 ‘Sholti’에 가까운 발음이라는 게 무려 <TIME>지에 실린 적도 있었다. 스웨덴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노벨 평화상도 수상했던 Dag Hammarskjold는 살아생전 받은 가장 많은 질문이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느냐”였다고 하는 게 보자마자 이해가 된다. 한국어로는 ‘하마슐드’라고 표기하는 게 가장 가까운 발음으로 통용된다. 지금의 계절을 하도 많이 ‘썸머’라고 하는 통에 ‘함마슐드’라고 쓰면 안 되나 싶기도 하지만, 안 된다! 굳이 언어학적 설명을 곁들이지 않아도 저녁식사 ‘dinner’를 ‘딘너’라고 하지 않고, 망치 ‘hammer’를 ‘함마’라고 하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같은 이치로 보면 된다. ‘오함마’는 타짜 아귀나 쓰는 말이지 교양 있는 나와 여러분이 쓸 말은 아니다.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딩요가 호나우지뉴로 바뀔 즈음 중국의 등소평은 덩샤오핑으로 불리었는데 그렇다면 일관성 있게 주윤발은 저우룬파, 이소룡은 리 샤오륭이어야 하거늘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주윤발과 이소룡은 양보하기 싫다. (이소룡의 경우 ‘브루스 리’까지는 양보할 의향이 있다) 그래서 두 분을 예로 들기도 했는데 특히 내 ‘본색’ 연재 글 제목에 큰 영감을 주신 <영웅본색>의 주윤발 ‘따거’를 나는 차마 저우룬파라고 못 부르겠다. 그렇다.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저렇게 내내 떠들어놓고 정작 나는 이러고 있다. 외래어 표기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는 건 국립국어원의 일관성 있는 노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나 같이 양보하기 싫은 고집쟁이들 때문인지도. 그럼에도 변명을 대자면 리우뻬이, 꽌위, 짱페이, 쮸커콩밍을 대고 싶다. 각각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이다. 이들을 양보 못 할 분들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 본다.      


글이 다소 장난스럽게 가벼워지는 농담조로 가는 것 같아 좀 각 잡고 쓰자면 일관된 번역 표기가 중요한 이유는 ‘피터’와 ‘표트르’와 ‘삐에르’와 ‘베드로’가 실은 동일인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국에 사는 헨리가 프랑스로 가면 앙리가 되고, 캐나다에 사는 캐서린이 러시아를 가면 예카테리나가 되며, 미국에 사는 마이클이 독일에 가면 미하엘이 된다. 이것만 봐도 번역에서 이름이 지니는 그 중요성이 결코 적지도, 작지도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름은 이렇게 그 사람의 국적을 짐작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나아가 성격까지도 암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저번 번역본색에서 언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Scarlet O’Hara인데 보다시피 O 다음에 어퍼스트로피가 쓰였다. 이는 아일랜드 사람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같은 이름을 쓰는 이들이 많이 그렇듯 낭만적이면서도 다혈질적인 성격을 암시한다. 다만 역시 짐작하다시피 이렇게 넘겨짚는 건 자칫 심각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무엇보다 인종 차별적 요소가 짙기 때문에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그대로 흘려버리면 된다.     


끝으로 번역본색에서 항상 언급한 안정효 선생을 뺄 수 없기에 이름과 관련하여 선생이 소개한 일화를 언급한다. 선생이 전업 번역가로 들어서기 전 브리태니커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에 치렀던 입사 시험에서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로부터 탈출하는 장면을 번역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 문제에서 관건은 오디세우스가 말한 “My name is Nobody” 번역이었다. 이렇게 말한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의 하나 남은 눈마저 찌르고 도망을 치는데 누가 네 눈을 그렇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폴리페모스는 “Nobody did”라고 하고 이렇게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꽤 만만치 않은 번역을 응시자들이 어떻게 했나 싶어 검토 중 선생의 무릎을 친 탁월한 번역이 있었는데 “내 이름은 아무도안”이 그것이었다. ‘아무도안’이라는 이름은 외국 작품답게 이색적이면서 “Nobody did”도 “아무도안이라니까” 라고 번역함으로써 “아무도 아니라니까”와 같은 발음으로 그 맛까지 잘 살리게 된다. 오래전에 <슈퍼맨이 돌아왔다> 프로그램에서 송일국 씨가 삼둥이를 두고 “힘든 건 세 배지만 보람은 세제곱”이라는 말을 한 게 인상적이었는데 번역도 어쩌면 그렇지 싶다. 그 어떤 일 못지않게 힘들지만 해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은 분명 그 곱절 이상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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