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승철 Aug 04. 2023

독서본색 3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로 나타나는 '증오' 범죄 

뉴스를 듣기 겁나는 요즘이다. 흉악범죄야 이전에도 늘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뭔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라는 건 나만 가지는 감정은 아닐 것 같다.      


“행인을 향해 자동차가 돌진한다. 내가 그를 구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번거롭고 위험하기도 해서 가만히 있었고, 행인은 크게 다쳤다. 나는 자동차로 그 행인을 치지 않았으니 잘못한 것이 없는가, 아니면 그 행인이 다치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잘못한 것이 있는가?”     


오늘 금정연 작가 트윗에서 보고 마음이 심란해진 글귀였다.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만 막상 내가 저 처지에 놓였다면 전자 쪽으로 억지로라도 마음을 돌릴 것 같다. 인간은 본디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도록 두뇌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작동되는 존재니까.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개 ‘의인’이라는 칭호를 달고 뉴스와 SNS에서 화제가 된다. 그럼 그들은 인간이 아닌 건가? 당연히 그들도 인간이다. 다만 흔치 않을 뿐이다. 그들의 두뇌 시스템은 그럼 뭔가 다른 건가? 아마도 그럴 것이리라 보지만 인간의 두뇌 자체가 매우 복잡한 체계로 구성되기에 여전히 연구가 활발한 분야일 것이다. 이 하릴없는 소리를 정리하자면 지난 잡문본색 글에 썼듯 우리네 인간은 원래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해한 존재다.      


따라서 뉴스에서 보도된 저 끔찍한 사건들의 범죄자를 놓고 그가 왜 그랬을까 하는 담론들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맥락은 다르지만 최규석 작가의 <송곳>에서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사측 직원 한 명이 자해를 하자 주인공 이수인이 말한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그러자 구고신 소장은 냉소 가득 답한다. “길 가는데 어떤 미친놈이 갑자기 덤벼들면 맞서 싸우든가 빨리 도망치든가 해야지 저 놈이 왜 미쳤나 그건 알아 뭐 하게요?” 굳이 ‘이유’나 ‘동기’를 찾으려 들자면 이미 벌어진 특정 범죄사건 가해자의 그것을 찾기보다 향후 또 벌어질지 모를,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사건들에 대한 일종의 ‘예후’를 진단하는 차원에서 찾으려는 노력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지만 나는 ‘증오’를 꼽고 싶다.      

물론 새로운 견해는 아닐 테다.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병적 증세가 심각한 적대심으로 나타나 타인에 대한 혐오나 증오로 이어져 벌어진 참사와 같은 식의 설명을 언론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증오를 꺼내든 건 윌러드 게일린 교수가 쓴 <증오: 테러리스트의 탄생>이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학)가 아닌 심리(학) 분야로 구분되는데 “증오라는 감정 자체가 역사적으로도 인간 본성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즉 심리학자들이 처음으로 연구했다”라고 책에서도 언급된다. 저자에 따르면 증오는 우울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감정 이상이다. 흔히 사용되어 온 용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도 증오를 경험한 바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 증오를 겪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우리 주변에 테러리스트가 많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일단 증오에는 명확한 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증오는 그 적에게 수치심을 주고 파괴하는 행위를 즐긴다. 이는 분명 드문 현상이지만 분명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겪었다고 착각하는 증오는 대부분 ‘편견’이나 ‘편협’ 일뿐이다.     


문제는 그 편견이나 편협이 언제든 증오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노예해방이 이루어지면서 흑인들에 대한 편견이 증오로 바뀌었다. 노예가 인간이 되자 백인들은 죄책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들이 노예일 때는 아예 인간으로 취급을 안 했기 때문에 굳이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자신들과 ‘똑같다’고 여기지 않았던 대상이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자 순식간에 두려움을 부르는 ‘적’이 된 것이다.      


편견과 편협은 내가 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반대쪽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심하며 따라서 언제든 그 반대쪽은 적으로 간주할 수 있고 증오는 그렇게 생겨난다. 이 책의 저자 게일린 교수에 따르면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의 격노라 해도 증오에는 미치지 못한다. 격노는 가장 극한의 화이다. 하지만 그 화는 감정일 뿐이다. 이토록 강한 감정 상태에서 사람은 가장 나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꼭 증오 때문은 아니다. 즉 격노로 인해 살인은 할 수 있어도, 그렇다고 그를 산 채로 트럭에 매달고 오랜 시간 끌고 다니다 이미 죽은 그의 사지를 절단하는 행위를 하진 않는다. 격노가 뜨거운 감정이라면 증오는 차가운 열정이다.”     

이 글의 서두에 지금은 뭔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라 썼는데 보도되는 저 끔찍한 범죄들이 이 책에서 언급한 증오 때문일 수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격노라는 뜨거운 감정으로 사람을 찌를 수는 있어도 이미 다쳐 쓰러진 그 사람에게 다시 달려들어 찌르는 건 분명히 단순 격노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염세적이고 거대담론화 시키는 견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게 시대의 병적 징후로까지 생각된다.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이라는 책을 쓴 도널드 서순 교수는 저서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그람시가 말한 위기는 권위의 위기였다. 구체적으로는 지배 계급들이 기반을 잃어가고 그들의 지배를 떠받치는 합의마저 시들해지며 따라서 대중에 대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장악력도 허물어지는 상황을 말했다.      


그람시의 저 말이 오늘날의 우리 시대상과 너무 동떨어진 말로 들리지 않는 것은 지나친 염려일까? 아니라도 그럼 우리는 그 다양한 병적 징후들을 극복할 힘이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영문본색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