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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Aug 05. 2023

번역본색 6

언제라도 늦지 않다, 번역의 지난함을 안다는 건.

영화나 책 등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별점으로 평점을 매겨봤다면 Leonard Maltin이라는 이름을 알 필요가 있다. 이미 유명인이기도 하지만 그가 바로 별점 평가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1969년부터 그는 <Leonard Maltin’s Movie Guide>라는 제목의 책을 꾸준히 펴내며 예의 그 별점과 함께 영화 평론을 담았다. 시작부터 그를 언급한 이유는 그의 이름은 과연 어떻게 우리말로 표기해야 하는가를 언급하기 위해서다. 지난 번역본색에서 우리말 외래어 표기는 일관성이 없음을 지적했다. Leonard Maltin 역시 그 한 예가 되는데 검색을 하면 ‘레너드 말틴’이라고 나온다. 실제로는 ‘레너드 멀틴’이라고 해야 원음에도 가까운 표기지만 문제는 이 ‘레너드’에 있다. 전설적인 명지휘자 Leonard Bernstein은 ‘레너드 번스타인’이라 표기해서 좋은데 구조 언어학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는 Leonard Bloomfield는 ‘레오나르드 블룸필드’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각자의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도 이런데 소위 말하는 장삼이사들에게는 어떤 고민이나 노력 없이 그냥 막 부를 것으로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각 나라별로 외래어 표기에 별점으로 평가를 매긴다면 우린 결코 후한 평점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일관성 문제는 영어 학습에서도 사실 고민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독해력 향상을 위해 원서 읽기의 효과는 누구나 강조하는 바지만 원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견해 차이를 보이거나 아예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자기 수준에 맞거나 한 단계 정도 위 수준의 원서를 골라 사전을 찾지 말고 모르는 단어도 문맥으로 추론하며 쭉쭉 읽어나가라 권하는 한편 어떤 이는 그래봐야 눈치껏 요령으로 의미를 대강 짐작하는 수준 밖에 되지 않으며 내용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음에도 모르고 넘어가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르는 단어나 구문은 일일이 찾아보며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래도 전자 쪽에 더 무게를 두는 입장이긴 하지만, 번역에서만큼은 반드시 후자 쪽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당연한 방법을 실행하지 않고 ‘이 정도는 당연히 안다는 착각’으로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번역에 임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지적질할 처지는 못 된다. 공식적인 번역을 한 적은 없지만 원서를 읽을 때마다 내 나름대로는 번역을 한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따라서 의미 파악이 된 경우도 그것이 맞는지를 꼭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러면 의외로 어렵게 의미를 읽어낸 문장들은 그래도 제대로 이해를 해낸 반면, ‘이 정도는 뭐’ 하고 간단히 넘어간 문장들에서는 심각한 오역을 심심치 않게 한 경우들이 많았다. 얼른 생각나는 예로는 “The snow drifts higher” 가 있는데 나는 이 문장을 처음에 당연히 “눈발이 높이 휘날린다”는 의미로 넘어갔다. 그랬다가 여기서 쓰인 drift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자 사전을 찾고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는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drift는 ‘눈이나 모래 같은 것들이 바람에 날려 쌓이다’는 의미가 있고 해당 문장에서는 바로 그렇게 쓰였다. 그래서 ‘바람에 날려 쌓인 눈더미’는 아예 snowdrift라는 명사로 굳어져 쓰인다. drift를 처음에 나처럼 이해를 했더라도 그다음에 higher에서 의심을 했어야 번역가의 자질을 지닌다고 믿는다. 눈발이 흩날리든 휘날리든 ‘더 높이’ 그런다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럼 더 낮게 흩날리는 눈이 따로 있나? 중간 정도로 휘날리는 눈도 별도로 있고? 당연히 아니라는 생각이라면 drift의 의미를 제대로 찾았어야 하는데 염치없이 지적질을 마저 하자면 감히 단언컨대 현재 출간된 번역서의 매우 상당수가 그런 당연한 검증 절차 없이 전반적인 의미만 통했다면 이 정도는 뭐 하는 식으로 버젓이 ISBN을 달고 서점 매대에 누워 있든 꽂혀 있든 할 것이다. 그렇게 편집자의 눈까지는 요행히 넘어갔더라도 다행히 눈 밝은 독자들의 검열에 걸려 크고 작은 오역들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작지 않고 덕분에 전반적인 출판 번역의 수준은 점진적일지언정 조금씩이나마 상향 평준화된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높이 쌓인 눈더미처럼 아직도 치우고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여기 브런치 스토리에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기 전에도 번역에 대한 지금까지 쓴 이야기들은 관심 있어하는 지인들한테 그리고 오래되긴 했어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든 적도 있다. 그러면 한결같은 반응으로 ‘번역이 그렇게 지난한 작업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때는 ‘그걸 정녕 몰랐던 건가’ 싶어 번역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게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으려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이제라도 알았으면 그래도 다행인 거지’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부족한 깜냥이나마 번역 이야기를 계속 잇고 싶다.      


관심이 부족해서 그렇지 찾아보면 지금 내가 쓰는 이런 쪽글들과는 비할 바 없이 훌륭한 번역 관련 저서들과 논문들, 자료들이 많이 있다. 이걸 번역가들을 비롯해 관련 업종 당사자들에게나 필요한 콘텐츠 정도로 여기지 말고, 보다 완성도 높은 독해를 위해 나한테도 필요한 양식들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피로 쓴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니체는 남겼다. 실제로 니체는 별 의미 없이 책을 그저 뒤적거리는 사람들을 경멸에 가까울 정도로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나는 뒤적거려도 좋으니 그런 양서들을 꺼내서 만져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make one’s bread and butter by는 ‘밥벌이를 하다’ ‘생계를 꾸리다’와 같은 의미로 널리 쓰이는데 나는 이게 처음부터 그런 번역으로 쓰였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bread and butter를 말 그대로 빵과 버터로 번역이 먼저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러다 번역본은 어디까지나 한국인들과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함임을 감안해 ‘밥벌이’라는 번역을 누군가 처음에 시도했을 것이다. 또 그러다 안정효 선생처럼 철저한 원칙주의에 입각한 번역가들은 아무리 그렇다고 서양권의 식문화를 임의로 동양권의 그것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보다 보편적인 언어를 생각해 ‘생계’라는 번역을 시도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둘이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날 그냥 뚝딱 만들어지거나 이루어지는 건 없다.      


다음의 번역본색에서 번역의 원론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니체가 말한 “피로 쓰인 책”으로 봐도 큰 과언은 아닐 번역가들의 피땀 어린 노고의 흔적들을 짚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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