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미생'이 '완생'에 가까운 그 숭고함에 대하여
오늘 같은 월요일은 웹툰 <미생> 보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다 오늘은 이 미생과 관련해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써보고자 원래는 잡문본색을 쓰려했는데 독서본색으로 우회(?)했다.
국어사전 정의에 따르면 ‘문맹률’은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의 비율을 일컫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한글이라는 그 우수성이 세계적으로도 이미 입증된 독창적 문자 체계 덕분에 실질적 비문맹 국가로 분류된다. 그런데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을 일컫는 ‘문해력’ 측면에서는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요즘 한창 이슈인 이 문해력 문제는 사실 내 기억이 옳다면 이미 6, 7년 전부터 경종을 울렸었다.
그때부터 OECD 국가들 가운데 꼴찌라는 통계도 있었고, 그건 55세 이상 장년층의 경우에서만 그럴 뿐 10대와 20대에서는 오히려 상위권이라는 반박도 있었다. 여하튼 분명한 건 우리가 그렇게나 자랑하는 한글의 우수성에 비하면 그리 자랑할 만한 지표는 못 된다는 점이다. 물론 쓰는 문자가 우수하기 때문에 그 문자를 쓰는 이들의 문해력도 반드시 우수해야 한다는 상관관계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식은 느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견해는 아니겠지만 나는 독서가 바로 그 문제의식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일단 지금 너무 바쁘고 독서에 특별한 흥미를 붙이지 못해 그렇지, 시간적 여유만 있고 흥미에 맞는 책만 발견한다면 독서 정도야 어려울 것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이게 심각한 ‘착각’이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피아노 칠 줄 아세요?” 같은 물음을 보자. 누군가 이렇게 물어올 때 피아노 칠 줄을 모르는 경우 모른다는 대답을 별 스스럼없이 한다. 그런데 누군가 “책 읽을 줄 아세요?” 하고 물어온다면 그 물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누가 봐도 독서랑은 담쌓아 보이는 사람에게조차 “책은 얼마나 읽느냐”는 식으로 스스럼없이 수준을 높여준다. 답하는 쪽에서도 “책은 ‘잘’ 안 읽는다”는 식으로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해서 말한다. 그럼에도 본인은 그걸 무려 ‘겸손’한 답이라 생각한다. 실은 오히려 자만에 가깝다. 그것이 진짜 겸손이려면 “책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 글자는 읽을 줄 아는데 글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식의 답이어야 할 것이다.
미술 감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난해하기로 유명한 현대 미술은 제대로 감상하는 법이 쉽지 않으므로 작품 이해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먼저 습득하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내공을 인정한다. 그걸 특별히 마지못해 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현대 문학 감상에서는 사뭇 풍경이 달라진다. 작품 감상에 필요한 배경 지식을 먼저 습득하려들지도 않거니와 여의치 않을 때도 자신의 부족한 내공을 인정하기는커녕 작가나 작품 탓을 한다. 꼭 그렇게 어렵게 써서 잘난 척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피아노 연주와 미술 감상처럼 독서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책 읽는 게 뭐 어렵다고 하는 식의 안이한 마음부터 먼저 고쳐야 할 것이고.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야 잘하는 거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진짜 공부를 잘하는 이들은 어떤 핑계나 자기 위안 없이 그저 오늘도 또 지금 이 순간도 묵묵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채우기 위해 실천한다.
안다. 피아노 연주나 미술 감상, 그리고 일반적인 공부와는 달리 독서는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바로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이 뭐 알아주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어디 가서 뽐낼 만한 일도 아님을. 맞다. 무엇보다 독서 행위 자체가 특별히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게. 그렇지만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독서는 흔히 하는 비유처럼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즐거움이 분명 있음을. 아는 작가들이 많아지고 출판사나 번역자에 따라 책을 고르는 요령 등이 늘어나서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던 대형서점의 그 많은 책들이 점차 편해지는 걸. 또 책을 읽는 목적도 달라진다. 텍스트 자체에서 느껴지는 즐거움도 있음을 안다. 이건 가사나 멜로디와 관계없이 노래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즐거움을 맛보려면 본인이 아직 아마추어 단계도 이르지 못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스스로를 일부러 깎아내릴 필요까지야 물론 없겠지만 이제 막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 피아노 연습생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의식적인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교본이 필요하듯이 독서도 교본으로 삼을 만한 양서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내게 그런 첫 교본 역할을 해주었던 책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의 눈이 멀고, 그 눈먼 사람을 만난 사람도 눈이 멀어버리고, 따라서 결국 한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눈이 멀어버릴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진보한 이 사회 속에서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야만성과 잔인함은 그저 감추어져 있었을 뿐, 없었던 게 아님이 드러난다면. 특히 지금 이슈 되는 사회상과 보자면 눈이 멀어버린 극단적 상황이 아닌데도 이렇다면 하는 생각에 진저리 쳐진다.
있음 직도 하지만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일 수도 있고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일어날 개연성은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소설의 정체성 중 하나기도 하다. 충분히 있음 직한 일을 허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그래도 완전에 가까운 책을 읽는 행위, 우리네 미생이 완생에 가까운 그 행위는 시대가 아무리 변한대도 변치 않을 숭고한 즐거움일 것이다. 즐거움에 비교우위를 둘 수야 없겠지만, 그보다 큰 즐거움을 나는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