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황현산 선생을 기리며
네이버에서는 오늘이 세계 고양이의 날이라고 일러주는데 내게는 故황현산 선생의 기일이다. 선생께서도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셨던 걸로 알기에 아주 관련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다. 나는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선생의 글을 애독한 수많은 독자들 중 한 명이었고 생전에 그가 목포에서 문학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실제로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까지 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의 부고를 접한 것. 그저 허망하기 그지없었던 5년 전 그날 기억이 여전히 또렷하다.
하여 날이 날이니 만큼 이번 독서본색에서 꺼내든 책은 두 권으로 모두 선생의 저서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과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이다. 전자는 선생의 칼럼집 모음이며 후자는 선생의 트윗 모음이다. 선생과 일면식은 없다고 했지만 트윗으로 멘션을 주고받았던 적은 있다. 번역에 관한 선생의 견해에 내가 숟가락을 얹었었고 감사하게도 공감을 해주셨던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여기에 옮기고자 암만 트윗을 뒤져도 찾지를 못하겠다. 괜히 분한 마음에 이게 다 일론 머스크 이 ‘X’ 같은 아저씨 때문이라 저주해 본다. 언제가 되었든 주커버그 형아한테 쥐어터지길.
“광복절의 노래에는 모호한 구절이 없지 않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부터 그렇지만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감아야 했던 선열들을 추모하는 마음 정도로 이해해야지.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곰곰이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은 없지만 쉽지 않다.”
곧 있으면 다가오는 광복절 즈음에 선생이 남겼던 말이다. 요즘에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라떼만 해도 광복절을 비롯해 국가기념일 노래는 학교에서 당연히 숙지해야 했다. 배우면서 다른 기념일 노래들도 그랬지만 특히 이 광복절의 노래는 가사가 이해하기 어려웠었는데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선생의 이 글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보들레르의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인데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히 숨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다. 악의 평범성은 이런 데서도 드러나는 것.”
선생과 보들레르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보들레르의 작품들 번역과 비평에서 가장 독보적인 지위를 지녀서인데 요즘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선생이 남긴 저 말을 다시 보니 마음이 더 스산해졌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창조의 의지는 정복의 의지와 같다. 창조는 우리가 손님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떤 풍경 하나를 만들어 덧붙임으로써 제한된 시공에서나마 이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일이기 때문.”
역시 선생이 남겼던 말씀으로 마찬가지로 요즘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입추인 오늘, 절기는 무시 못해서 부는 바람의 체감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럼에도 절기가 무색하게 폭염은 여전했다. ‘기후 변화’가 아니라 ‘기후 위기’이고 ‘지구 온난화’가 아니라 ‘지구 가열’이라는 건 이미 몇 해 전부터 중론이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행세 중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떳떳할 건 없기에 그나마 죄책감을 내 나름대로는 조금이나마 덜고자 최근에 복간한 보배 같은 잡지 <녹색평론> 여름호를 주문했다.
선생은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완역하면서 그 고충과 푸념 등을 트윗에 종종 토로했었는데 이를테면 “<말도로르의 노래>에서 문장 하나를 번역하면 이렇다. “내 생존이 그 연명을 한 시간의 경계 밖으로 밀고 나가기는 불가능하다.” 한 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말을 꼭 이렇게 한다.”
그렇다고 시인을 원망하기도 ‘뭣하다.’ 이 ‘뭣하다’는 말은 일부러 썼는데 “할머니들은 가난한 조카가 찾아오면 “나라도 뭣하면 뭣할 텐데 나도 뭣해서 뭣하고” 했는데 다 알아들었다.”라고 선생이 트윗에 남긴 바 있어서다. 신기할 정도로 내 경험과도 꼭 같아서 고향말인 ‘거시기’의 힘과 더불어 ‘뭐시기’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동백에는 흰 동백도 있다고 하면 “붉은 동백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하며 덤비는 사람들이 있다. 붉은 동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흰 동백도 있다고 했을 뿐인데 꼭 이러는 사람들. 어쩌면 사회의 모든 문제는 다 이런 식이지 않을까. 그런 이들이 되려 나더러 벽창호란다.”
제일 좋아했던 선생의 트윗 중 하나다. 요즘 같으면 왜 ‘벽창호’ 같은 단어를 쓰느냐며 입을 삐죽 대는 사람들이 있겠지. 나는 그런 사람들이 선생이 위에서 말한 “이러는 사람들”과도 같다고 본다. 그저 자기들이 멋대로 정한 재단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맞추려 드는 사람들.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런가 싶기도 하고 특히 문학을 안 읽어서인가도 했는데, 여기에도 선생은 촌철살인을 날린 바 있다. “시를 읽어야 사람이 된다는데 문제는 사람이 돼야 시를 읽는다는 것!”
“논술 고사 출제위원을 오래 했는데 학원이나 과외가 소용없는 문제를 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결국 학원을 이길 수 없었다. 학원은 수많은 두뇌들이 1년 열두 달 생각하고 출제위원들은 열 명이 한 달 정도 생각하니 질 수밖에.”
오늘은 또 수능 D-100일인 모양. 언론과 인터넷 서점에서도 화제길래 눈길이 머물렀던 선생의 트윗이다. 선생이 담당했던 논술뿐 아니라 수능 자체도 마찬가지 아닐까. 전문가들이 집단 지성을 이루어 만들어낸 문제들이지만 사교육 시장에서는 그 못지않은 전문 인력들이 보다 많은 수와 시간을 들여 수험생들을 훈련시킨다. 킬링 문항 어쩌고 하며 수능 시험에 문제제기를 하는 그 취지에는 개인적으로도 공감하는 바지만, 수험생들을 진짜 ‘킬링’하는 건 과연 무엇인지, 정녕 그런 턱없이 어려운 문항들이 문제의 핵심인 건지는 더욱 신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선생은 “인문학은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은사님 한 분도 “네가 무슨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반드시 그 전의 침묵보다 나아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지금껏 여기 브런치에 쓴 글들도 그렇고 이전의 이런저런 다른 것들도 그렇고 아무래도 두 분 선생의 말씀에 맞진 않는 듯하다. 나야말로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