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반경과 배신, 그리고 비극
브런치에 제법 글을 쓰지 못했다. 독서를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보통 그렇듯 그저 게으름 탓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역시나 덧붙이고픈, 인간은 아무래도 변명을 타고난 ‘호모 엑스큐스’ 인지도.
이 변명 아닌 변명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해 줄지 모르겠지만 이번 독서본색에 꺼내든 책 세 권은 모두 공감에 관한 책이다. 먼저 믿고 읽는 과학철학자 중 한 명인 장대익 선생의 저서, <공감의 반경>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 중에 실제로 총을 발사한 병사는 15-20%에 불과하다고 언급한다. 아무리 적군이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행위란 매우 괴롭고 힘든 것이다. 이후 이를 쉽게 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훈련법 등이 개발되었고 베트남 전쟁 때는 85%의 병사들이 총을 쏘았다고 하지만 막상 살상률은 낮았다. 무공 훈장을 받은 이들도 알려지다시피 대다수가 PTSD에 시달렸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한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앗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은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한 공감력에서 출발한다.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을 인간에 그치지 않고 점차 넓히는 것이 큰 특징이기도 하다. 저자는 내집단 편향을 만드는 깊고 감정적인 공감을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힘으로 보아 공감의 ‘구심력’으로, 외집단을 고려하는 넓고 이성적인 공감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는 힘으로 보아 공감의 ‘원심력’으로 간주한다. 이 둘은 서로 투쟁하고 있으며 어느 쪽이 강하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만큼 영향이 지대하다. 문명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연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커야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건 깊이가 아니라 넓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깊이가 많이 작용한다. 개인적 체험으로 보자면 내 친구 한 명은 우리 사회에서 끈끈하기로 유명한 호남향우회와 고려대 동문회, 그리고 해병대 전우회에 모두 소속되어 있다. 그의 소속감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이 필요 없을 정도지만 흥미로운 건 그의 소속에서 벗어난, 특히 그 상대편에 존재하는 소속 집단에 대해서는 반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놀라울 만큼 무감각하거나 때로 반대편에 서 있는 점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과잉공감은 비인간화를 부른다”라고 지적한다.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포로들을 고문하던 미군 병사들은 타자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자기 집단에 대해 과잉공감을 보인 이들이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동료들을 해친 이라크 군인들은 비인간화하기 너무도 쉬운 대상이었다.
관련하여 팬데믹은 부정적인 감정을 전염시키기도 쉽다고 저자는 말한다. 혐오나 경멸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빠르게 전염되는 현상을 저자는 ‘이모데믹’이라 칭하는데 emotion+epidemic의 뜻이다. 전염병의 위험이 증가할수록 노인, 장애인, 외국인, 심지어는 비만인에 대한 혐오나 경멸이 증가하며 이는 비정상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외집단으로 간주되어 병원체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심할 당시 교육학적으로 보자면 등교 1순위는 비대면 수업이 힘든 학생들이어야 하지만 그런 배려 따위는 없이 오로지 고3이 단연 1순위였다. 입시와 관련해 여러 말들이 많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수능이 차지하는 위상은 그만큼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중요한 건 누구를 먼저 등교시키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라고 저자는 일침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도 빼기에 급급하고 수능에만 올인할 것이 아니라 이런 전염병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앞으로 방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과연 인간은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본 이가 있었다.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라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은 보존과 통합을 추구하는 에로스적 본능과 파괴와 공격을 추구하는 공격 본능을 동시에 가진다”라고 답했다. 따라서 “공격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하지 않도록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그도 사실 낙관적이지 않았다. 본능을 억제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어려움을 그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은 느린 인지 과정을 통해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독서는 필살기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종이책은 느린 생각을 정돈하는데 최적화된 매체기 때문이다. 없는 걸 보고 있는 것은 다르게 보며 옛것은 새롭게 만드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느린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고 이를 충실히 해내는데 독서만 한 행위도 드물다. 똑같이 몰입하더라도 영화나 TV,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를 볼 때와 종이책을 볼 때 사용되는 뇌는 다르다는 건 이제 상식이며, 독서는 폭넓은 공감력을 향상한다는 것도 이제 또 하나의 상식이 될 차례다.
한편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의 저자인 폴 블룸은 공감에 반대할 뿐 아니라 도덕적 견지에서 보자면 공감 능력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까지 한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능력을 더 기른다면 지금 같은 충돌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 했고, 나치에게 유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었다면 홀로코스트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자는 이런 건 모두 착각이라 주장한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현재 우리에게 당면한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은 공감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과해서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1984>를 꺼내 든다. 거기서 주인공 윈스턴을 괴롭히는 오브라이언에 주목한다. 오브라이언은 여러모로 괴물이 분명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매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때문에 윈스턴과도 처음에는 친구 행세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도 붙임성이 좋았으며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는데 매우 탁월했다. 그리고 오브라이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자네가 일기장에 자네를 이해할 수 있고 자네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니 내가 적이든 친구든 상관없다고 쓴 걸 기억하나? 자네가 옳았어. 난 자네 생각이 마음에 들거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즐겁고. 자네가 제정신이라는 것만 빼면 자네 생각과 내 생각은 거의 같아.”
자, 오브라이언은 과연 공감능력이 없어서 저런 소리를 할까? 아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공감능력, 특히 인지적 공감능력이 빼어나다. 다만 그 우수한 능력이 주인을 잘못 만났을 뿐이다.
정서적 공감능력이 실제로는 도덕을 좀먹고 있음을 저자는 다방면에서 예로 보여준다. 흄이 남긴 유명한 말, “이성은 열정의 노예다”는 흔히 공감에 찬성하는 논거로 많이 인용된다. 그러나 저자는 흄의 명제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가 말한 열정이라는 것은 꽤 폭넓은 개념임을 지적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연민이나 친절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분노, 수치심, 죄책감 등일 수도 있는 것이다. 책의 원제는 <Against Empathy>인데 이쯤 되면 ‘배신’이라는 역서 제목이 결코 과하지는 않음을 책은 보여준다.
<공감의 비극>이라는 책을 쓴 강준만 선생은 <공감의 배신>에 공감하는 기조를 보이며 적지 않은 부분을 인용한다. 아울러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실명 비판과 정치적 발언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면서도 스스로 ‘선’을 지키고자 한다. “이 정도에서 그치고 화제를 급전환해야지 더 들어가면 위험해진다”며 몸을 낮춘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이라는 책에 따르면 “누군가의 신념에 도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했다면서.
강준만 선생의 책은 이 정도에서만 그치고, (유명하다시피 워낙에 다작을 하는 분이라 앞으로의 독서본색에도 단골(?)이 이미 예약된 분이나 마찬가지 셔서라는 변명으로 또 일관해본다) “사람들에게 친절하되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이 말을 조금 빌자면 “사람들을 이해하려 애쓰되 함부로 공감하려 들지 말라”는 말로 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