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특유의 수사법이라면
딱히 게으름 피운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난 글을 올린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나 아예 한 해가 다 가버렸다. (그래도 글 한 꼭지 없었음은 게으름 맞지만) 오늘 다른 이들도 많이들 그랬듯이 나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싶었고 나름대로 꾸려가고 있는 본색 시리즈들 중 여기에 처음 올렸던 <영문본색>을 이어가기로 한다.
“Do not mince matters!”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그 뜻은 알기 어려운 부분 때문에 영어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오늘 새해 첫날인 만큼 그 마음을 한 번 더 다잡아보라 권하고 싶다. 물론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면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재미’만 한 계기도 없을 테다. 어떤 말이든 의미를 갖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이유를 알다 보면 재미도 생기는 법이다. mince는 요리할 때 자주 쓰이는데 잘게 다진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chop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mince는 chop보다 더 잘게 다지는 걸 의미하고, matters는 여기서 words를 의미한다.
그럼 쉽게 그냥 words를 쓸 일이지 왜 가뜩이나 다른 뜻도 많은 matter를 갖다 쓰냐면 지난 <영문본색> 글들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앞에 쓰인 mince와 ‘두운’ 즉, alliteration을 살리기 위해서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영어는 이 alliteration만 제대로 숙지하고 있어도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재미까지 함께 따라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저 말은 “잘게 다져서 말하지 말라!”는 뜻인데 그건 또 무슨 말일까? 있는 그대로 말하라는 뜻으로서 말하자면 돌려 말하지 말라는 말이다. mince는 이런 뜻에서 minced oath라는 표현도 있다. 맹세를 잘게 다진다는 건 또 뭔 소리인가 싶다면 여기서 oath는 맹세나 서약이라는 뜻이 아니라 ‘욕설’을 뜻한다. 따라서 minced oath는 ‘순화된 욕’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damn 같은 직접적인 욕설보다 dang 또는 그보다도 강도가 약한 darn 정도로 순화해서 쓰는 경우를 뜻한다.
“돌려서 말하지 말라”는 말을 먼저 소개했지만 이렇게 가급적이면 돌려서 좋게 말하는 어법을 ‘완곡어법’이라 하고 영어로는 euphemism이라 한다. 단어 생김새가 좀 어려워 보이지만 어원으로 보자면 eu는 good을 의미하고, phem은 speak를 뜻해서 여기에 요즘 같으면 우리말처럼 보이는 ‘~이즘’이 붙어 말 그대로 ‘좋게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하겠지만 eu가 good을 의미하고 phem이 speak를 뜻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면 어휘력에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다. 요즘 나오는 영어 어휘 학습서들이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꼭 어원을 소개하는 이유기도 할 것이고. 참고로 euphemism의 반대는 dysphemism이다. good에 반대 개념인 bad를 의미하면서 이 역시 이쯤 되면 우리말처럼 보이는 ‘디스’가 붙었을 뿐이다. 즉, ‘위악어법’이 된다. 굳이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는 의사들을 가리켜 croaker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불길한 예언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croak는 원래 개구리나 까마귀가 울어대는 소리를 뜻하여 듣기 싫은 소리를 뜻한다고 보면 되는데 croaker는 사실 위악어법이라기보다는 그냥 비속어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나처럼 영문학을 전공하면 필연적으로 수사법을 익힐 수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로는 litotes가 가장 흥미로웠다. 우리말로는 ‘곡언법’이라고 하는데 부정어를 중복해서 사용하거나 에둘러 말하면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는 대신 그 속뜻은 오히려 더 강하게 내비치는 어법이다. 역시 영문학 전공자라면 필수적으로 다루는 작품 <베오울프>에서 “That sword was not useless to the warrior now”라는 표현을 예로 들면 실제로는 “That sword was very useful”과 같은 뜻이다. 그럼 이건 그냥 ‘이중부정’ 아니냐 싶지만 litotes는 이중부정과는 분명히 구분되는데, 예를 들어 a citizen of no ordinary city라고 하면 그냥 ‘평범하지는 않은 도시민’ 이라기보다는 ‘매우 특별한 도시민’이라는 뜻이 된다. 보다 쉽고 확실한 예를 들면 'He is no ordinary person'이라 쓰면 우리말 어감 그대로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는 뜻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여간내기가 아니다’는 의미도 된다.
이렇게 우리말 어법과도 상당히 죽이 잘 맞는 경우를 보면 반갑기도 하고 영어 공부 할 맛도 나지만 언어인 만큼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당연히 더 많다. 부정어를 다룰 때 특히 그런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내 생각에 그는 영리한 것 같지는 않다”는 의미로 “I think he is not smart”라 했더니 듣고 있던 원어민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면서 “I don’t think he is smart”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일러줬다. 그게 계기가 되어 이왕 공부하는 영어라면, 그리고 영어권 원어민들과 잘 소통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그들이 쓰는 어법대로 따르려는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다 싶었다. 그즈음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책이 상당히 인기였는데 특별히 그 책을 폄하할 생각은 없고, 그 책의 효과와 장점도 분명히 인정하는 바기도 하지만, 그 책 제목을 영어로도 Absolutely don’t study English라고 버젓이 책에다가 함께 쓴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를 안 하니까 영어를 저렇게 쓰나 싶은 과한 생각마저 들었었는데 영어권 원어민들의 어법만을 그대로 무분별하게 따를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저건 너무했다. Never study English like that!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영문본색>을 쓴답시고 해놓고 <잡문본색>처럼 돼버렸는데 오랜만에 쓰다 보니 좀 흥분해서라고 봐주고 다시 흥미를 돋우는 영어 문장 그 본연의 맛을 소개하자면 영국의 유명 정치인이었던 벤자민 디즈레일리의 어록이 유명하다. 그에게 ‘불운’과 ‘재난’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겠냐 묻자 이렇게 답했다.
“If Gladstone fell into the Thames, that would be a misfortune; and if anybody pulled him out, that would be a calamity.”
글래드스턴이 만약 템즈 강에 빠지면 그건 ‘불운’이요, 누구라도 그를 강에서 구해낸다면 그건 ‘재난’이라는 말인데 글래드스턴은 당대에 정치적으로 디즈레일리의 가장 숙적이었다. 우리나라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정치인들은 그렇게나 많으면서도 정작 저렇게 재치 넘치는 ‘디스’를 보여주는 정치인은 없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내가 뭐라 한다고 달라질 일도 없을 테고 정치인들이 들어주는 일은 더욱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는 저 유명한 명제를 오늘 새삼 새겨보면서 나부터라도 잘하자는 새 마음으로 올해는 번역도, 독서도, 영어도, 잡문 글쓰기도 열심히 해보자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