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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해 록] 작작酌酌과 각자도생覺者圖生

by 윤해

그 작작 좀 하시오 라는 말을 우리는 살면서 말하기도 듣기도 하지만 작작이라는 말의 뜻을 어렴풋이 알고 쓰지 정확히 알고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작하시오라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의 활용을 좀 적당히 하시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수인修因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과도하게 나대거나 설쳐댈 때 쓰는 말 정도로 알고 있지만 작작을 한문으로 써보면 皭皭(맑을 작)이라는 한자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綽綽(너그러울 작)을 쓰면 너그럽고 여유가 있음을 나타내며 灼灼(불꽃 작)으로 쓰면 마치 불꽃이 타오르듯 기세가 등등함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해 낸 작작의 또 다른 성어는 酌酌(술 부을 작)이라는 한자어다.


술술 들어가는 술로 쓰는 세계사는 두주불사의 영웅담부터 주지육림의 멸망사까지 국가의 흥망성쇠는 물론 개인의 생로병사까지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술은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과도 같은 영원한 동반자이다.


밥배가 있고 술배가 따로 있다는 주당들의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지난밤의 주용담酒勇談을 무용담武勇談처럼 늘어놓는 저녁 어스름, 해장술 앞에 마주 앉은 술친구들은 술로 몸이 삭아가는 만큼 점점 더 또렷해지는 정신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오늘도 그만 작작酌酌하라는 마눌님의 바가지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술병에 담긴 술을 어느 정도 기울여야 술이 나올까라고 지레짐작斟酌 하면서 따르는 술의 양을 정하는 작정酌定도 없이 서로의 주량을 가늠하여 적당하게 따르는 참작參酌도 하지 않고 무작정無酌定 부어라 마시라 술친구와 마주 앉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수작酬酌을 주고받다가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와 같은 소프라노 마눌님의 좀 작작酌酌 하라는 환청이 들리거나 말거나 초저녁부터 시작된 주당들의 해장술은 새벽녘까지 이어지며 사람이 술을 마시는지 술이 사람을 마시는지 점점 주아일체酒㦱一體의 경지로 내달린다.


일성호가一聲胡笳라고 하는 환청 같은 피리 반주를 무시하며 일성호가一聲虎歌를 호기롭게 부르는 주당들 술자리 작작酌酌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皭皭(맑을 작)은 실종되고 綽綽(너그러울 작) 하자고 마신 술을 작작酌酌 하다 보니 기세등등하게 灼灼(불꽃 작)되어가면서 자신을 술로 태우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술은 술로 문화인류사를 써야 할 정도로 방대하고 결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사냥감을 쫓아다니며 고단한 일상을 살았던 원시인류가 속이 움푹 파인 그루터기 나무 안에서 썩어가던 과일에 스며든 빈 물이 자연의 절묘한 온도와 습도를 만나 발효라고 하는 섭리로 재탄생 한 순간 오직 생존을 위해 뛰고 달리던 원시 인류 몸 안에 숨 쉬고 있던 소우주는 저작과 소화, 이화와 동화라고 하는 일상을 뒤로하고 효소와 발효가 음주가무로 우리를 춤추게 하는 화학적 세상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한평생을 살면서 진정한 친구와의 사귐은 한 명도 힘들고 두 명은 많고 세 명은 불감당 이듯이 친구 보다도 더 오랜 친구 같은 술을 대함에도 두 잔은 많고 세 잔은 불감당인 것이다. 그저 한 잔 술로 시름을 달래자고 홀짝홀짝 마신 술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되면서 그만 작작酌酌하라는 마눌님의 충고도 무시하고 빠져들어가는 술의 세계는 순리順理가 아닌 주도酒度가 지배하는 중독의 세계이다. 희로애락 오욕칠정 속의 세상에 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작작 연 유여유( 綽綽然有餘裕) 하자고 마신 술에 작작 연 유여유(酌酌然有餘裕) 하다가 손이 떨리고 몸이 폐인이 되어가는 그들을 향해 외친 외마디가 그 작작酌酌 좀 하고라는 말은 아니었을까?


‘술 권하는 사회’는 1921년 현진건이 발표한 단편으로,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기력과 절망을 ‘술’로 드러낸 작품이다. 그로부터 백 년이 훌쩍 지나고 망국과 해방, 건국과 전쟁을 거쳐 눈부시게 외형적 성장을 거듭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고 선진국에 다다른 한국사회는 더 이상 술 권하는 사람도 없고 술 권한다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술을 받아먹는 사람도 실종 중이다. 즉 술마저도 사회화를 마감하고 개인화의 길로 접어든 느낌이다. 고난의 사회상을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과거의 주당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알코올 중독자 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신인류만 존재하는 삭막한 세상에서 애주가는 더 이상 발 붙일 자리가 없다.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작작酌酌 좀 그만하라고 충고해 주는 안해도 친구도 어른도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절감하고 있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다가오고 있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짐작斟酌도 못한 체 미래에 대한 작정酌定도 없이 현실을 참작參酌 하지도 못하고 무작정無酌定 어찌 되겠지 라는 낙관으로 수작酬酌만 부리는 빌런들에 의해 세상은 악세로 달리고 있다. 그 악세는 개인을 집요하게 분리하고 반목하게 하여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아닌 각자도사各自圖死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 각자各自가 각자各者가 아닌 각자覺者로 깨어나야 각자도사各自圖死가 아닌 각자도생覺者圖生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분열되고 갈라서는 길은 대로大路요, 단합하고 깨어나는 길은 첩첩산중의 오솔길이니 2026년을 앞둔 세상을 살아내는 일이 대략난망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세모의 삭풍이 옷깃을 여미는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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