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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Apr 01. 2024

어느 날 아침 별안간 브로콜리가

[도서] 브로콜리 펀치 Review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손이 브로콜리로 변해버린 남자가 있다. 사람의 손이 브로콜리로 변했다니. 듣자마자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지만, 이유리 작가의 세계 속에서 그건 대단히 요상한 일은 아니다.


어머 브로콜리 저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저씨도 저렇게 된 일이 있었어, 그래도 저렇게 큼직한 브로콜리가 되다니 아이구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는걸. 원준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재빨리 수건을 다시 감았다. ... 간호사는 그 위의 여백에다 동글동글한 글씨로 오른손 브로콜리, 라고 써넣었다. (85-86p)


다시 말하지만, 한쪽 손이 브로콜리가 되는 일 따위는 이구아나가 사람처럼 굴거나, 죽은 전 남자 친구의 손톱이 말을 걸거나, 아버지가 나무가 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자기를 화장하고 나면 남은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인공은 흙과 뼛가루를 섞어 화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비슬비슬한 오천 원짜리 나무 하나를 심었다. 그렇게 나무는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 날 주인공이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자 베란다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물. 


아버지였다. 그 뒤로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화분을 텔레비전 앞으로 데려가서 「한국 미식 여행」이라는 방송을 보여준다. 구루마를 사서 아버지를 산책시켜 주기도 한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인데 아주 이상하게도 독자를 납득시킨다. 아무래도 이유리 작가의 무심한 태도 덕분이 아닐까 싶다.


... 화분에 꽂는 노란 식물 영양제를 사다가 꽂아주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마시면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즐거워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라면 아기 때를 말하는 것일까 씨앗일 때를 말하는 것일까, (18p)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엿듣다가 풉 하고 웃음이 터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웃음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말에 집중해서 귀를 쫑끗 세우게 되고, 이게 전부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건 전부 상관없어지게 된다. 이유리 작가의 글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집의 포문을 여는 빨간 열매는 과일 트럭의 아저씨가 권하는 과일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쑤시개에 꽂혀서 한 번만 먹어보라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그런 과일. 일단 멈춰서서 달짝지근한 열매를 씹어 물고 나면 주인아저씨의 언변에 사로잡혀 돌아가는 길에 한 아름 안아 들게 되는 것이다.




빨간색은 목형규의 색깔이니까



두 번째 소설 둥둥에 나오는 주인공은 간단히 말해 아이돌 빠순이다. 그녀는 웬만한 사립대학의 서너 학기 등록금 정도 되는 빨간 캐리어 안에 마약을 몰래 넣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가져다주려 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녀에게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인천대교에서 추락했다. 


덕분에 캐리어를 안고 물속에서 발을 휘젓는 중이면서도 교각의 달린 조명을 보고 '빨간색은 목형규의 색깔'이라며 좋아한다.


솔직히 한심했다. 아이돌이 뭐라고 머핀을 잘라서 돌돌 만 대마초를 숨겨넣고, 그걸 진공 포장해서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고, 아이돌에게 줄 평범한 선물처럼 보이도록 홀로그램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받아서 샐쭉 웃을 목형규를 생각하며 좋아하고, 그러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고.


하지만 과거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부터는 그녀에게 이입하기 시작했다.


형규를 처음 만난 여름을 잊을 수 없다.

걷고 싶은 거리 뒷골목으로 막 접어들려는데 웬 남자아이 하나가 길거리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주저앉는 아이를 보고,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옆의 편의점으로 들어가 얼음 컵과 생수를 샀다.

이거 마시고 해요. 그러다 쓰러져요.

갑자기 아이가 입술을 한껏 우그러뜨렸다. 곧이어 쌍꺼풀 짙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방울이 거짓말처럼 또르르, 굴러내렸다.

고마워요. 누나. 진짜. 고마워요. 너무.


주인공은 서양화과 사 학년으로 한창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목형규가 어떤 번개처럼 내리꽂힌 것이다. 어쩐지 그 순간을 알 것도 같았다. 누구에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신기한 점이 있었다. 팬들이 가지는 사랑의 특수성이었다. 어떤 팬들은 대가 없는 사랑을 추진한다.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으면서도 웃음 한 번에 만족하곤 하는 것이다. 서해 바다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는 주인공이 그랬다.


그런 팬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듯한 글이었다. 우습게 봤던 그 마음은 어느샌가 소중하게 다가와서, 처음의 비웃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말았다.  




무심하게 툭, 독자를 설득하는 글



이처럼 이유리 작가의 글은 강요 한번 없이 독자의 생각을 뒤집어 놓는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시작한 소설은 어느새 '이런 소리구나'하고 납득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구겨 넣기는 전혀 없다. 소설집은 마치 일렁이는 서해바다 같아서 흐름을 맡기고 둥둥 떠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물아일체 되어 있다.


그러니 눈과 손을 맡기고 책장을 넘겨보자. 책장이 아주 물 흐르듯 넘어가서, 책을 덮으면 어느새 자정이 넘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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