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매일 사랑과 행복의 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행복이나 사랑을 느끼지 못할까요?
이것은 사랑과 행복에 대한 큰 질문입니다. 대답하기 쉽지 않지요. 분명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과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반면에 그들의 삶에서 행복감이나 사랑을 느끼기 쉽지 않다는 것이죠. 사실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는 한국사회의 급격한 삶의 수준 향상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고전적인 종교적, 철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소외’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을 경험하는 대신 ‘소외’ 현상을 겪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과도, 세계 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물론 ‘소외’ 현상은 독일 등 다른 곳에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더욱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물질적으로 결정된 위계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훨씬 강하게 인식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득, 자동차, 아파트 평수, 거주지, 금융자산등 개인의 물질적 지위에 대한 정보는 다른 곳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중요하게 인식됩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거의 모든 사회적인 관계가 쉽게 경쟁적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나와 동등한 관계라기보다는 ‘경쟁자’로 인지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이 6.25 전쟁 이후 최빈국에서 빠른 시간에 번영을 이뤄낸 역사적인 배경과도 관계있을 것입니다. 이 역동적인 변화가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의 경험을 상당히 제한한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직의 더 높은 자리를 두고 동료들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받는 사회적인 압력은 극대화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정신적인 자유를 향유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정신적 자유를 배워야 할 학교나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소외 현상에서 인간관계는 기능적인 관계가 됩니다. 간단히 말해, 의존적인 관계가 됩니다. 기능적인 관계는 역동적인 현대사회에서 매우 빠르게 변화합니다. 인간관계 역시 수단화되어, 관계가 지속될지의 여부도 빠르게 바뀌게 됩니다.
이런 역학적인 관계에서 당연히 타인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은 한국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한국이 비교적 작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임에도, 주변 강대국들(중국, 일본 등)의 영향권에서, 주권을 지킨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죠.
이 역사적 배경을 통해 왜 한국인이 일상생활에서 권력 지향적인지, 전략적 사고가 왜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삶의 행복을 경험하는 이상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2.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면에서 행복은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개별적이고 힘든 상황에서도 말이죠. 우리는 언제 가장 행복한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한국 학생들이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독일 학생들보다 확실히 덜 행복해 보입니다.
행복에 대한 경험은 다시 말하지만, 각자의 좋고 나쁜 조건과 어느 정도 무관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측하거나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행복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창의력이 발휘되는 분야나 종교적인 경험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경험은 일반적이진 않지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행복에 대한 경험은 신비로운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한편으로는 ‘행복’이 최우선 가치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진실, 진실된 삶을 위한 노력, 그리고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과 같은 중요한 가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사람은 그들의 폭력적인 행위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거나 생각하든 그것은 바른 삶이 아닙니다. 그건 확실히 좋은 삶이 아닙니다.
좋은 삶은 행복한 삶이지만 사람은 언제나, 그리고 모든 순간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옳은 일을 하고, 자신과 환경에 대해 책임감 있게 살아간다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읽을 수 없다면, 특정한 행복의 경험을 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행복의 경험은 다양합니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핵심적인 문제에 이어집니다. 한국에서는 행복을 체험하고, 특히 장기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배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나 직장생활에서 서로 충분히 대화하고,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독서 능력 또한 제한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책을 읽을 시간도 능력도 부족합니다. 사람들은 동영상, 쇼츠 (60초 이내의 짧은 동영상)를 소비합니다. 우리의 뇌는 다양한 행복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되지 않았습니다. (다층적이고 즐겁고 지적으로 영감을 주는 토론을 하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준 책을 읽어본 적인 언제였는지 자문해 보세요.)
확실한 것은, 복잡한 예술작품, 소설, 음악 감상과 그리고 학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등, 세상의 복잡성에 대해 이해를 키운다면 장기적으로 행복을 경험하는 데 도움을 될 수 있습니다.
3.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우리의 인지체계는 변화합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비이성적인 인지상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줍니까?
헤겔은 ‘이성(합리성)’이 ‘추상적으로 사고’ 한다던지 ‘이성적인 결정 내리기’ 혹은 ‘과학적 논문’을 쓰기 위한 능력 이상이라고 말합니다. 합리성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모든 삶과 인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헤겔의 다음과 같은 통찰은 인간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라는 질문에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존재가 아닌, 깊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사고력도 타인과의 교류와 상호작용에 의해서 발전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체계 안에서 개인으로 존재하고 개인이 됩니다. 공동체 생활 없이 합리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인간다워지기 위해 타인과 소통하며 상호작용해야 합니다.
4.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제가 이전에 대답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한국 사회는 행복에 대한 경험을 장려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 또한 특별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많이 지쳐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한국에서는 사회적인 생존이 우선시됩니다. 80년대 사회혁명을 주도했던 세대들은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웠습니다.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사회적 비전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고, 그럴 힘도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외에, 어떤 비전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젊은 세대의 탓만은 아닙니다. 기성세대와 심각한 물질만능주의는 젊은 세대의 정신적 상태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성세대의 낡은 정치적 비전과 뻔하고 식상한 설득은 신뢰를 잃었습니다. 한국 사회에 지배적인 것은 물질적, 사회적 지위를 최적화하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5.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십만 명 중 2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할까요?
네. 그것은 특히 젊은 세대에 적용됩니다. 삶의 가장 전성기에 있는 젊은이들이 말이죠. 그리고 독거노인 역시 마찬가지로 자살률이 매우 높습니다.
이 사실은 젊은 세대에게 한국 사회는 매우 힘든 곳임을 반영합니다. 젊은이들은 사회적 압박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생존을 위한 경제적 투쟁에서 상위권을 차지해야 하고, 원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인 자신과 타인에게 ‘패배자’로 인식됩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살 시도의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무자비한 승자/패자 논리, 경쟁은 스포츠 경기나 정치적 선거, 기업 간 시장 경쟁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으로 여과 없이 확장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영역이 경쟁과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직결되는 것 같습니다. 승자/패자 논리가 삶의 내밀한 대인관계 영역까지 지배할 정도로 제한이 없는 곳에서는 회복탄력적이고, 박애적인 삶의 의지가 발현되기 어렵습니다.
6. 독일인은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하나요? 독일인들은 우울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나요?
우울증은 현세대의 전 세계 적인 현상입니다. 우울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족들에게 극단적이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울증은 심각한 정신적 질환입니다.
우울증을 다루는 방법과 질병으로 인식하는 정도는 사회마다 다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울증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매우 경계해야 해야 할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병에 대한 무지’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우울증’ 일 경우 보통 의사에게 갑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의료적 도움을 찾고, 받게 됩니다.
우울증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한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다행히 치료방법이 있기는 하지만요.) 추측건대, 이에 대한 이유는 우울증 증상이 인식되지 않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7. 욕망이란 뭘까요? 술이나 마약중독 사회는 무엇을 뜻할까요?
우선, 함께 게임을 하거나(컴퓨터 게임 포함),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등의 즐거움과 욕망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이런 즐거움들은 태곳적부터 인간 삶의 일부였으며 인간의 권리로 여겨져 왔습니다.
한국 사회에 마약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약물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술은 확실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합법 약물과 불법 약물의 경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논의해야 합니다. 과학은 분명 이 부분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특정 약물(예:헤로인)은 그 효과가 개인과 사회에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합법이 아닌 것이 맞습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술에 관한 한, 한국인은 중국, 일본, 혹은 러시아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독일보다 술을 덜 마시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내 관찰은 철학과 동료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들은 물 외에 다른 것들을 즐겨 마시긴 합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특정 합법, 불법 약물 복용뿐 아니라, 중독성 있는 행위는 큰 문제이며, 이슈가 됩니다.
삶이 무의미할수록 중독성 행동에 빠지기 쉽습니다. 특히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암울하며 좌절할 때, 즉각적인 행복감에 대한 절박한 욕구가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삶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암울하고 좌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 위험하고 파괴적인 메커니즘이 시작됩니다.
철학자로서 제가 경고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인문학(철학, 신학, 역사, 문학) 이 학문 교육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회는 의미에 대한 실존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체 경험, 자기 파괴적인 탐색 즉 중독행위의 문을 열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독성 행동에 대한 최선의 예방책은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인간의 의미 있는 경험에 대한 광범위한 지평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임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인식 없다면 교육이 없고, 교육이 없으면 사회는 중독행위에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8.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20%는 기독교인입니다. 한국에는 76,0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교회는 한국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줍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외로움에 빠지지 않고, 사회적 결속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탈북민들을 돕는 등 특정한 사회적 과제를 수행합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매우 강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교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교회는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교회는 정부(세금)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습니다. 한국 교회는 재정을 자립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독일에는 한국과 같이 거대한 교회 조직이 없습니다. 한국 대형 교회는 재정이 튼튼하고, 권력과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인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입니다.
교회는 한국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일부 교회는 이 문제에 선을 긋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교회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재정을 조달해야 하므로, 경쟁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 점은 경제적, 사회적 압력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기독교 교리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불행한 융합을 조장합니다. 독일에서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의 일부가 아닙니다.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정치적인 과제를 떠안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영성을 경험할 기회를 열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음산한 유령 환상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9. 한국 젊은 세대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한국의 젊은 학생들은 그들이 비록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어느 젊은 세대보다 강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그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한복음 3장 8절)'라는 말이 정확히 맞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의 가능성과 지적 잠재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기성세대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이 되고 맙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초반에 언급했듯, 젊은 세대는 눈에 띄게 ‘비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발전을 위한 관점이나,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체념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것, 긍정적이고 좋은 면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더 이상 낡은 정치적, 종교적인 설교와 관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공허한 문구에 가까웠습니다. 대부분 젊은이는 본능적으로 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 지 스스로 재발견해야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전제조건은 낡은 이데올로기 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이 고착화된 말과 사고방식에 대해 무조건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은 아주 좋은 시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에 대해 새롭고 생동감 있는 (다이내믹한) 관점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 훌륭한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두 세대는 서로를 더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