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도, 탄도항 여행기
결혼 후 보금자리를 꾸민 아파트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던 떡볶이 가게, 단골 병원, 좋아하던 아이스크림 카페도 친정에 두고 왔다.
남편을 따라 경기도, 안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역 교회를 다니게 되어, 아파트 주민들 5~6명과 셀(조)을 이루었다. 정기적으로 만나고 차도 마셨다.
나는 늦은 나이 결혼으로, 자연 임신이 어려워 의학의 힘을 빌어야 했다. 이 과정이 부부, 특히 여성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배주사를 맞고, 호르몬제 투여, 시술 등의 의료과정은 오롯이 여성이 감당해야 한다. 내가 병원을 10번 가면 남편은 1번 정도 오면 된다.
치료가 시작되면 높은 심리적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 결과의 비확실성을 앞두고 기대한다. 그리고 실패를 하게 되면 심리 그래프는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한 회당 비급여 치료비에 따라 200만 원~300만 원을 웃도는 높은 시술비용도 부담이다.
이 파도를 여러 번 겪게 되면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이 때문에 각 자치단체에 난임 우울증 상담센터가 개설되어 있다.
같은 조 언니들은 내게 많은 힘이 돼 주었다. 셀모임에서(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 차 마시며 속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고 나면,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같은 셀 언니 중 한 명이 선재도에 섬집이 있다고 했다. 섬집이라! 섬집아기란 동요가 떠오른다. 순해지는 기분.
언니들과 함께 섬집에 가기로 한 날. 프리랜서는 하루 24시간을 자유롭게 쓰니 시간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 관리가 어려워 전날 늦은 밤까지 수업과 일을 마무리했다. 피로가 몰려왔다.
오랜만에 집을 나선다는 설렘과 함께 길을 떠났다.
지인의 차를 타고 1시간쯤 대부도를 향해 달렸다. 점차 자태를 드러내는 선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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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하루에 두 번씩 길이 열렸다 닫혔다 해서 ‘모세의 바닷길’이라고 한다. 길이 닫히면 꼼짝없이 섬에서 밤을 지새야 한다는 것.
바닷길을 건너는 동안 기분이 묘했다.
섬집에서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 언니는 늘 있는 일인 것처럼, 근처 식당에서 뷔페를 주문해서 한 상 차려놓았다.
평소 흠모했던 캡슐 커피맛도 기가 막혔다. 캡슐이 쓰레기가 된다고는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언니말로는 섬집은 멀리서 볼 때 아름다운 100M 미녀와 같단다. 들어와 살게 되면 집과 정원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고.
정기적으로 시댁, 친정 가족들 모임, 지인들 초대, 오랜 시간 봉사하고 있는 사랑부(발달장애아)들을 데리고 와 즐거운 한때를 선물한다고.
어쩐지 대접하는 동안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여유 있었다. 손님인 나는 원래 사는 사람처럼 편안했었다. 그 이유는 언니의 남편과 언니가 새벽부터 모든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섬집에 먼저 와서, 모든 준비를 마친 수고가 숨겨져 있었다.
결혼 후 손님맞이를 몇 번 해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님을 맞는 전후로 준비 과정 청소ㅡ 정리가 보통일이 아니었다. 손님맞이를 대수롭지 않게 수시로 해내는 언니를 보니 존경스러웠다. 베푸면 베풀수록 풍족하게 채워지는 언니집을 보니, 신기하면서 다행으로 여겨졌다.
언니는 남은 뷔페반찬을 찬찬히 봉지에 채워 손님들 손에 들려주었다.
오는 길에 들린 탄도항에서 바람이 만들어준 멋들어진 포즈를 했었다.
머리모양은 엉망이 됐지만, 서로 포즈를 알려주고 사진 찍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바닷가에 살고 있는 작은 게도 만났다. 처음엔 파랬다가 빨개지는 함초도 보았다.
시간이 흘러 밀물이 들어올 시간이 되었다.
만조로 바닷길이 닫힐지라도, 우리의 마음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