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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Sep 11. 2024

<페르소나>, 영화의 페르소나를 벗겨내다

잉마르 베리만 <페르소나(2013)>을 보며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는 필름이나 영사기 등의 장치들을 보여주거나, 오프닝 시퀀스에서 제작자의 이름이 적힌 흰 바탕의 화면과 인물의 얼굴, 사물의 클로즈업을 교차해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이며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에게 일깨워 준다. 대사 없이 소년을 따라 이어지는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집중하고 있던 관객은 인물과 사물 사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필름 인서트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모습에 다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것이 필름에 기록되어 영사기를 통해 상영되고 있는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때로 어두운 영화관 속에서 스크린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 마치 실제 현실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인물 혹은 카메라의 시선에 동일시되어 디제시스에 몰입하게 되는데, 비록 소문일 뿐이라고 알려졌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처음으로 다수의 관객 앞에서 상영되었을 당시 관객이 실제로 자신에게 기차가 달려오는 줄 알고 놀라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효과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영화는 이처럼 때로는 허구의 세계를 현실처럼 보여주어 관객에게 실제와 같은 인상과 감각을 제공하는 페르소나를 갖는다.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는 이러한 영화가 가진 페르소나를 벗겨주는 영화이며, 그것을 통해 관객이 인물에게 몰입하고, 동일화되기보다, 엘리자베스와 알마 두 여성의 동일화와 이면을 제대로 관찰하게 해준다.

<페르소나>,2013
알마役 ,비비 앤더슨(Bibi Andersen)

 흐릿한 여자의 초상화를 쓰다듬는 남자아이가 등장하고 엘리자베스 보글러와 알마라는 두 인물이 등장하며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는데, 이때 알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부분은 마치 관객인 우리가 문을 열고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간 듯한 인상을 준다. 알마를 지켜보는 시선에 몰입하려던 찰나, 그녀의 앞에 있던 카메라는 그녀의 뒤통수와 옆모습을 단절된 컷으로 비추는데, 이로써 그녀는 보이는 대상이 되고 관객은 극 중 인물에게 동일시되기보다는 그녀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위치를 가진다. <페르소나>에서는 인물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가 빈번히 활용되는데, 덕분에 관객은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서로에 관한 생각에 공감할 수 있으며 함께 가까워지고, 때로는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서로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떠올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혼동하며 동일화되어 가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 샷이 점점 섞여가다가 마침내 반반으로 합쳐져 한 사람의 얼굴이 된 결정적인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하나의 얼굴은 일시적으로 사진처럼 정지한다. 이는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의 후반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단체 사진과도 유사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두 사람의 클로즈업으로 만들어진 정지된 얼굴은, 인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게 만들며, 관객에게 하나의 얼굴로 합쳐져 이제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분간하기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두 인물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화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몰입하고 동일시해왔던 인물들로부터 일시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며,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현실적인 인상을 주는 영화의 페르소나를 벗기고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엘리자베스役, 리브 울만(Liv Ullmann)

 두 여인의 서사가 마무리되고 오프닝에 등장했던 소년이 다시 등장하는데, 소년이 쓰다듬던 초상화 속 여인이 엘리자베스라는 것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그 소년은 엘리자베스의 아들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엘리자베스와 알마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또한 역시 2차원의 화면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는 행위를 뚜렷하게 자각하게 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 초상화의 정체와 소년이 드러남과 더불어 촬영 현장에 놓여있는 듯한 촬영용 카메라들과 앞서 보았던 영사기, 그리고 끝이 거의 보이는 다 풀려가는 필름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인식시킴과 동시에 영화가 끝을 맺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페르소나>는 엘리자베스와 알마라는 두 여인을 통해 인간의 깊은 심연과 이면, 죄의식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가 가진 페르소나를 드러내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을 인지하게 해주며 관객이 인물들에 동일시되지 않고 인물 간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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