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중구수치에 따라 전투태세가 되곤 했다.
웬만한 건 다 세균으로 보여서 가사노동을 했다. 매일 물걸레질을 했고 등에 땀이 났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삼시세끼 갓 만든 음식을 먹이느라 장금이로 살았다.
그마저도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가 정해져 있었다.
아이는 생일이어도 케이크를 못 먹었고 친구를 만날 수 없어서 슬퍼했다.
수영장에서 놀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고
언니와 학교 다니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아이의 소원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질 때까지만 해도
이만한 일인 줄 가늠하지 못했다.
소아암을 알면 알수록 지역의료체계와 소아암 전문의 숫자에 간담이 서늘했다.
내 아이가 막차를 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저출산을 걱정하는 정부가 얄밉고 국회의원의 손주들이 소아암에 걸리길 바랐다.
둘째의 소아암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2년이 순삭으로 지나갔다.
소아암항암주사실에서 커튼 너머 들리는 말이 무시무시했다.
몇 년 만에 재발해서 왔다는 말,
혀에 암이 생겨 자르기로 했다는 말,
소아암쉼터는 또 어떤가.
죽어나간 아이의 생수박스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소아암병동에 들어가면 딴 세상에 와있는 것 같았다.
창 밖에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햇살이 쨍쨍하게 비추면 또 그런대로 울적하긴 매한가지였다.
창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터널이 끝나긴 할까.
방사선과 항암을 완주할 수 있을까.
주변에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버텼고
생사화복을 주님께 맡겼다.
하루치 힘을 빌면서 딱 하루씩만 버텼다.
잘 해낼 수 있을까에서
'잘'을 뺐다.
잘 못 하겠더라.
하루씩 버티는 것도 고된 일상이었다.
다행히 완주했고 지금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한때는 아이의 수술자국과 맨질맨질한 대머리가 비현실적이었는데 말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 아이가 재발한다면 나는 다시 일어설 재간이 없다.
경과가 좋다는 의사 말에 안심하다가도 재발확률을 듣고서는 눈물이 후르르 흘렀다.
소아암에 협진으로 물리는 진료가 많다.
아이 한 명을 살리고자 어른 몇 명이 붙어있냐면 거의 군대다.
소아암프로수발러에게 마음 모아 응원을 전한다.
하루치 힘이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