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면역질환자의 원형탈모 이야기
01.
머리가 병적으로 많이 빠지는 걸 보고 있는 건 힘든 일이다. 인생에서 머리카락이 이렇게 신경 쓰였던 적이 처음이다. 어릴 땐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머리끈으로 묶는 것도 힘들 정도였는데.
머리 감을 때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무슨 암 환자처럼 머리카락이 빠진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마다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힘없이 딸려 나온다. 그럴 때면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놀란다. 더 빠질 머리카락이 남아있다니. 내 머리카락은 수용성인가.
22살부터 머리를 길렀다. 계속 단발머리로 지내다가 처음으로 긴 머리를 해봤다. 나는 내 긴 머리가 마음에 든다. 부은 얼굴도 잘 가려지고 새침하게 찰랑거리는 모습도 좋다. 지금 나에게 긴 머리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다. 장점부터 말하자면, 머리가 길면 뒤통수에 있는 크고 희게 드러난 두피를 가릴 수 있다. 물론 내 눈이 뒤에 달리지 않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아마 티도 안 날 것이다. 묶고 다니기 좋고, 머리숱이 없어도 잘 안 보인다. 또 내심 '머리가 길어서 빠지는 양이 더 많아 보이는 거야. 실은 보이는 것의 반 정도만 빠졌을 걸.' 하며 자기 위안도 할 수 있다. 웃기게도 자기 위안을 위해서 아직까지 머리를 자르지 못하고 있다.
단점은 긴 머리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길고 많이 빠지는 내 머리카락은 집구석구석 어딜 가나 보인다. 신발장에, 옷 서랍장에, 욕실에, 싱크대에, 변기에, 침대에 온갖 곳에서 다 발견된다. 머리카락 하나가 눈에 띄면 집게손가락을 들어 잡는다. 그럼 쭈우욱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릴러 영화에서 살인마의 살해 협박 메시지가 어디를 가나 쫓아오는 것처럼 내 머리카락이 그런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건 진짜 공포다.
이런 공포가 불러오는 효과는 대단하다. 공포에 공포가 더해져 상상력을 키우는데, 현실적이라 더 무섭다. 취직도 못했는데 이거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만약에 전두탈모가 되어서 대머리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에 이건 티저일 뿐이었고 본편에서는 백혈병이나 암 같은 더 큰 질환이 숨겨져 있으면 어떻게 하지? 병은 병이지만 치료비가 더 걱정이다.
02.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면역질환자였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이 5살 때 발병되었고 대학병원을 연례행사처럼 드나들었다. 그러니 그건 나에게 일상 같은 거였다. 대학병원에 다니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새롭다. 이어 10대부터 고질적으로 나를 괴롭혀온 지루성 피부염을 앓았고 그건 악화돼서 건선 질환이 되었다. 다행히 23년도부터 면역억제 주사를 맞으면서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안심했다. 정말 평화로운 23년도였다. 모든 건 24년도가 되면서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면역질환자이면서도 스스로 환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지랄 맞은 면역체계는 나에게 일상이었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았다. 몇 번 임파선이 심하게 부어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엄중한 꾸중을 들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겼다. 시간이 지나면 다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랬었고, 환자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부모님도 그랬던 것 같다. 여하튼 병이지만 병을 인정하지 않는 덤덤한 집안에서 살았다.
03.
과한 자존감과 공허한 자기혐오의 격차가 커지기 시작한 것도 병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아서일까. 머리카락의 스트레스에서부터 시작된 생각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된 내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진다. 면역 질환은 보통 내 몸을 지켜야 하는 백혈구를 포함한 면역 체계가 적군이 아닌 아군을 공격할 때 발생한다. 면역이 심하게 떨어지면 외부균에게 공격받지만 면역이 심하게 높아지면 아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웃기고 아이러니하다. 내 면역체계가 내 심리 상태와도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더 좋아하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 염불처럼 '나를 더 사랑해 주자', '나를 더 아껴주자.' 되뇌어도 얄미운 사촌 동생처럼 흘겨보게 된다. 내가 나를 대하는 거리감이 그 정도다. 그래도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하니까 떡 하나 더 준다, 하는 느낌.
04.
여하튼 지난하고 볼품없는 이 시기를 견디는 나만의 방법은 유머, 회피, 몰입이다. 대머리가 된 나를 상상하면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웃기다. 대머리라는 단어 자체가 좀 웃기게 생기지 않았나? 내가 대머리가 되면 의미가 좀 달라지겠지만. 아마 내 두상은 찌그러진 감자처럼 못생기고 외계인처럼 기괴할 거다. 뒤통수가 동글동글했으면 보기에도 더 좋았겠지만, 대머리에 대비해 본 적 없던 머리는 사는 대로 생겼을 것이다. 그런 내가 대머리가 된다면... 안쓰럽고 웃기다. 성격상 가발을 찾아 쓰더라도 덥거나 불편하면 안 쓰고 다닐 것 같고. 대머리가 된 김에 유튜브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책도 쓰고 그러면서 살아야지. 대머리인데 여자고 웃기면 꽤 볼만할 것 같다. 탈모인들이 생각보다 많다. 수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힘든 시기에 내가 오타쿠라서 다행이다. 덕질로 회피하는 건 내 인생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좋지 않은 방법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신이 붕괴되는 것보다 낫다.
몰입이라고 거창하게 써뒀지만 별 거 없다. 책 읽고 필사한다. 요즘 필사에 재미 붙였다. 글씨체 교정에 꽤 열심이고, 예쁜 잉크와 만년필을 보면서 힐링하고 있다. 꾸준히 하면 내 문장력과 어휘력 모두 발전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책상에 앉아 몰입의 시간을 늘리고 있다. 머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다.
05.
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바로 그 문제. 취직. 병을 핑계 삼아 취직을 미루고 싶지 않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병을 핑계 삼아 취직을 미루고 있다. (하지만 서류는 여러 곳 썼고 면접도 갔다. 안 붙여주는 걸 어째.) 차일피일 취직 준비를 미루고 있지만 예전처럼 불같은 열정으로 과한 일정을 수행하지 않을 뿐, 진로에 대한 고민은 착실히 하고 있다. 일단 하고 싶음과 하고 싶지 않음에 대해서, 오래 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 내 몸을 지키며 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영어 공부와 더불어 각종 자격증 준비를 하지 않는 건 내 잘못이 맞다. 하지만 앞의 이유를 핑계로 (더 보기)
06.
뭐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이 글을 읽으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면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진짜 안쓰럽지가 않으니까. '힘들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모든 말들을 듣고 있기 더 힘들다. 검은콩을 먹어라, 맥주 효모가 좋다더라, 단백질을 더 먹어야 한다 등등 이런 말은 엄하게 금지한다. 하지 마라 그냥. 검은콩을 먹으면 낫긴 하겠지 한 8톤 정도 먹으면? 비싼 영양제 사줄 거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고, 차라리 잘 이겨내고 있다고 용기를 주는 편이 낫다.
글을 쓰니까 속이 훨씬 낫다. 글을 더 쓰고 싶다. 글에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