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를 3개월 만에 도망쳐 나온 이유
아이러니한 인생.
6/10에 인턴 3개월의 기간을 마무리하고 첫 회사를 나왔다. 앞뒤 안 보고 뛰쳐나왔다. 도망쳤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다. 힘들어하는 티를 내던 나에게 선뜻 다정한 말을 건네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그 사람들 덕분에 도망치고도 창피해서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를 더 알기 위해 무작정 써보는 글.
자기 연민에 차있으며 두서가 없고 쓸데없이 길어서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사람이 본다면 더 싫어질 수 있는 글임을 먼저 고지함.
원하던 회사에서 원하던 일을 배울 수 있어서 행복했던 입사 초기. 엄마는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며 매우 뿌듯해하셨다. 복지도 괜찮고, 초봉도 괜찮았다. 내 수준에 비해 과분할 정도라고 느껴졌다. 낯선 집단에 대한 경계심이 큰 나에게 '최고의 복지는 동료'라는 슬로건은 매우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나에게 디지털 마케팅은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우선 남들이 들었을 때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를 쓰는 직종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배울 것이 많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해보고 싶었다. 뭔가 그럴듯한 전문성을 갖춘 직종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광고가 아니라 디지털 마케팅이었던 것 같다. 업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고질적인 변덕이 나를 가로막은 걸까? 얄팍한 수로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을 가지고 싶어서 했던 선택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버티지 못했다.
야근이 계속되었다. 10시, 11시, 12시... 입사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는 거의 녹초가 되었다. 처음 야근하던 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힘들다기보다 즐거웠다. 하루를 꽉 채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서 씻고 누워 슬랙을 켜서 하루 동안 일한 내용을 돌아봤다. 자정, 새벽 1시가 지나도 슬랙에 '업무 마무리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퇴근한 건 팀의 인턴들 뿐이었다. 잠들고 일어난 다음 날, 새벽 4시에 팀리드의 '업무 마무리합니다'가 찍혔다.
새벽 4시에 사람이 퇴근한다고? 충격이었다. 뭔가 바쁜 일이 있었겠지, 오늘 하루만 퇴근이 늦어진 거겠지. 우선 새벽 4시에 퇴근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왔다. 그런데 새벽 퇴근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인턴들이 자정 전에 퇴근하는 건 인턴이라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정도였다. 일이 몰리면 자정이 넘어서까지 일하긴 했지만.
처음 배우는 일이라 그런지 실수를 연발했다. 아주 사소한 실수를 반복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내가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광고 문구에서 브랜드명 잘못 넣기, 오타 내기, 데이터 잘못 입력하기 등. 일이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데 실수가 한 번 나면 마무리가 늦어진다. 하나뿐인 사수는 내 실수를 전부 포착해 수습해 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수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고, 사수의 기분이 신경 쓰였고, 무능하게 보일까 봐 매 순간 초조했다. '꼼꼼하지 못한 죄로' 몇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일이 아주 바쁘게 흘러간다고 했는데,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써야 할 것 같다. 나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기본적으로 오전 업무가 끝나지 않아 팀원이 전체적으로 점심을 3시에 먹었다. 오늘 하루 세팅해야 할 광고 지면의 디자인 요청을 해야 하는데, 9시 30분에 출근해서 점심 먹기 전까지 마무리해야 점심 먹는 동안 디자이너가 작업해 지면을 전달해 줘서 퇴근 전까지 광고를 세팅할 수 있다. 그런데 하루에 광고 세팅 건이 많게는 10개에서 20개 정도 되었다. 오전 중에 마무리하려면 그야말로 숨이 가쁘게 일을 쳐내야 한다. 신경이 쏠려서 정수리가 아픈 기분으로 오전을 보낸다.
한심한 생각을 품고 살았으니 이걸 읽고 있는 누군가는 내가 싫어질 수도 있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조금만 힘들어도 '죽을까?'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 얄팍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알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 시기에는 참 쉽게도 나를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이때쯤에는 업무 스트레스, 사수와의 관계, 계속되는 야근과 함께 반복되는 실수 때문에 자아 존중감이 박살 난 시점이었다. 집에 가도 말이 없었고, 회사에서는 매일 울었고, 입맛이 뚝 떨어져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집에 가면 나를 돌보기 보다 숏츠와 릴스를 눈이 아플 때까지 보면서 일상에서 회피했다. 생각하는 걸 피했다.
이 시기에 신입 PT를 준비해야 했다. 완벽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기본도 하지 못했다. 업무 때문에 일을 미룬 탓도 있고, 팀 내에서 PT를 봐줄 시니어가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비우며 멘토 역할을 해줄 사람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PT를 붙잡고 물어보기에는 사수는 너무 바빴다. 이 시기에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나는 PT 10장도 채우지 못하고 제출할 위기에 처했다. 새벽 4시에 집에 도착해서 동이 틀 때까지 작업하고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래도 점심 먹는 시간을 줄여가며 어떻게든 10장을 채웠고 제출했다. 발표하는 날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발표가 끝나니 그래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큰 고비 하나 지났으니 다음에는 더 버티기 수월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PT 발표가 끝난 날 인턴 동기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나는 1차 술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내내 울었다. 나 빼고 전부 잘 적응하고 있구나. 그 자리에 있는 동기들의 사정은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그렇게 결정지었다.
마침 그 시기에 엘리베이터 공사가 있어서 나는 옆 동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을 지나 집으로 가야 했다. 집에 가며 내내 울던 날 옥상에 간 나는 옥상에서 한참을 울었다. 살기 싫었다. 옥상은 개방되어 있었고 난간에서 조금만 몸을 내밀면 너무 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쉬워서 무서웠다. 그리고 너무 쉽게 죽으려고 한 내가 불쌍했다.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 나 빼고 다 적응한 것 같은 동기들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것 같다. 스스로 박살 낸 자존감이 제기능을 못했던 것도 이유일 것이고. 어쨌든 당시에는 모든 문제가 나를 집어삼킬 듯이 크고 무서웠다. 퇴근길에 내 실수를 나열한 슬랙을 볼 때마다 몸이 따가웠다. 스트레스의 신체화를 처음 느껴본 것 같았다.
회사에서 업무를 보며 또 울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며 애쓰고 있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을 때 다소 충동적으로 팀리드에게 슬랙으로 면담 요청을 드렸다. 울면서 퇴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팀리드는 회사 내 다른 팀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혹은 팀 안에서 업무 중요도가 크지 않은 파트로 이동해도 된다고 했다. 매우 호의적인 제안이었으나 나는 그때 이곳에 남아있으면 내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도망친 것이 맞다. 도망쳤다, 그냥. 대책 없이.
퇴사를 결심하고 나서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쉽게 포기해 버린 나에 대한 혐오감, 큰 기획전이 시작되는데 도망치는 나를 보는 팀원들의 평가 등등 작은 문제를 확대해 내 안의 두려움을 키웠다. 불안함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문제는 상황을 확대 해석하고 지레 겁을 먹어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다들 힘들었던 경험을 한 번씩 떠올려 본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다른 길이 없어 보였다.
퇴사한 다음 날부터 내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집 나갔던 입맛이 돌아왔고 생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를 다니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온다. 그 시기에는 무능했던 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나약한 내가 있다.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모든 일을 복기하는 건 이런 문제가 또 생겼을 때 다시 도망치기 싫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아야 해결해 나갈 수도 있으니까.
일단 체력이 부족했다. 상황을 직면하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들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멘털도 결국 체력인데 저녁을 제때 챙겨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아예 포기해 버렸다. 상황에 이끌려 다니며 순간순간 드는 내 감정에 의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능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연하게 내가 못하는 부분을 인정하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개선하면 되는 부분인데, 당장 일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다 보니 에너지가 바닥났다. 그리고 평소에도 꼼꼼함과는 거리가 먼 내가 극도의 꼼꼼함을 요구하는 직종에서 일하려고 하다 보니 엇박이 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쉬는 동안 기초 체력을 기르고, 상황에 이끌려 가지 않게 나를 단련하는 일에 매진하고자 한다. 사실 퇴사한 지금 인생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학기 중이나 휴학 중에는 동급생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항상 불안했다면, 지금은 차라리 나 혼자만 덜렁 남으니 비교 대상이 없어 나에게 집중하기 좋은 때다.
퇴사 3주 차, 3주 동안 무얼 했냐고 물어본다면...
놀았다. 신나게 놀았다. 돈 펑펑 쓰고 스크린 타임 7시간 채우고 많이 먹고 시간을 물처럼 썼다. 여유를 갖는 건 좋으나 핸드폰만 쳐다보며 하루를 보내는 건 이제 지양해야 할 것 같다. 눈도 나빠지고, 나에게 집중하자는 원래의 의도와 많이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여하튼, 스스로에게 실망도 많이 하고 어려운 일을 겪은 최근 3개월을 털어놓았다. 다음에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자고 다짐해 보면서...
나를 응원해 줬던 모든 블로그 댓글, 카톡, DM 등등 너무너무 고맙다! 여기 따로 적진 않겠지만 항상 감사합니다.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서 도망쳐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