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다니는 생각들
01.
요즘에는 시도 때도 없이 글을 쓴다.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일단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글에서 만나는 사람과 실제로 대면한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 글은 가만히 앉아 나를 더듬고 그걸 전달하는 일이다. 그에 비해 말은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것이다. 말에는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방어 기제가 있다. 나를 보호하지만 남을 해칠 수도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그건 타의적이다. 반면 글은 나에게 집중하고 성찰한다. 그래서 온전히 자의적이다.
요즘에는 어떤 생각을 하냐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자명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긍정적인 것, 건강한 것, 목표가 있는 것 등.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무엇이든 매끄럽게 보인다. 서로 다른 면이 만났는데도 완벽한 굴곡을 자랑하며 용접된 지하철 손잡이처럼. 그러니까, 모든 이음새가 그렇게 매끄럽게 용접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질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속이 답답하고 눈을 부릅 뜨게 되는데, 그게 질투심인지 열등감인지 혹은 아예 다른 세상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경이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세상에는 여러가지 '좋음'이 있는데, 그것도 아주 자명하게 있는데, 나는 그것들이 정말 좋아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나는 아주 행복한 상태보다는 약간 우울한 상태가 좋다. 아주 건강한 사람보다는 약간 비틀린 사람이 좋다. 아주 낙천적인 것보다는 약간 비관적인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이런 것인데, 세상의 '좋음'과 부합하지 않아서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남들이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해보려고, 그리고 남들이 나를 그렇게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서 세계관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시기가 있다. 그게 아마 작년 6월쯤. 그때는 완벽하게 매끄러운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지각을 바꾸는 일이었다. 거대한 충돌이었고, 계속해서 갈등했다. 성장이라고 이름 붙인 자기학대가 계속되었다. 일기 끝에는 항상 '이겨내자','화이팅!' 혹은 '~해야 한다.' 같이 나를 위로하는 말이 붙었는데, 이제 보니 그건 강요였다.
사실 지금 1년 전의 나를 돌아보면 훨씬 원숙해 보인다. 애쓰는 내가 있었고 그래서 장하다. 대견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도 어쨌거나 그때의 연장선이 아닌가? 지금의 내가 못하는 일을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다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서 빼앗아간 무언가가 아닌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그 사이에 있는 공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취준생들의 정신병이 심화되는 이유는 기업이 원하는 매끄러운 인재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나를 붙들고 어떻게든 완벽하게 포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나는 더 멀리 떠밀린다. 세상이 용인하는 '좋음'이 싫어진다.
02.
그리고 내 생각은 타의적으로 떠밀려져서 가장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흘러간다. 도태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쓸모 없는 것으로 전락한 사람들. 과거를 핥으며 잠깐 빛났던 시절을 회상하는, 나와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들.
매끄러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인생이 즐거운 사람들. 그곳에서 애써 쓰라린 부분을 찾아내는 사람들. 흠집이 날까봐 두려워하고 정상성에서 탈락할까봐 두려운 사람들.
세상을 둘로 쪼개면 길에서 탈락해서 불안한 사람과 길에서 탈락할까봐 불안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그리고 둘은 같은 불안감을 공유하지만 절대 합의할 수 없다. 같은 말을 하며 싸우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