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여러분,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승무원의 차분한 안내방송을 시작으로 제주 한 달살이의 설렘이 좌석벨트처럼 무장해제 되었다. 이미 제주와는 친구, 남편, 가족과의 추억 여행을 공유한 친근한 섬이었다. 비행기 트랙에서 지상으로 이동하는 발걸음이 참을 수 없도록 가벼웠다. 모든 짐을 탁송 차량에 맡긴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달이라는 단위가 주는 긴 호흡과 여유, 혼자가 아닌 둘, 그것도 동갑내기 친구가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2023년 3월의 제주 여행은 그렇게 같은 듯 달랐다.
두 달 전 30년 공직 생활의 명예퇴직 마침표를 스스로 찍었다. 하마터면 열심히 일했을 남은 시간을 데리고 나왔다는 안도감으로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옆에 있는 싱글인 친구는 개인적인 이유로 1년 휴직 중이었다. 이미 제주 한 달 살기 유경험자였기에 든든한 가이드로서 부족할 게 없었다. 우리는 50대가 주는 자격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여행을 결정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데 장애물이란 없었다. 가족들의 이해와 지지는 그저 덤이었다.
약속한 장소에서 탁송 차량의 키를 안전하게 인계받은 우리는 차 속에서, 그리고 제주는 창밖에서, 함께 달렸다. 나보다 SNS에 익숙한 고마운 친구는 맛집 검색과 위치 경로까지 빛의 속도로 잘도 찾아냈다.
우리의 첫 끼는 제주돔베고깃집에서였다. 촉촉한 윤기를 머금은 보들보들 비계와 살코기의 조화는 잊지 못할 인생 보쌈 한 상 이었다. 도두동 무지개 해안에서부터 우리의 휴대폰 카메라는 열일을 하기 시작했다. 도두봉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제주 바다를 눈에 담으며 인스타 사진 명소에서 줄을 서기도 했다. 이호테우해변 말등대의 제주 노을은 여행의 흥분을 차분하게 위로해 주듯 따뜻하게 물들어갔다.
제주시, 우도, 서귀포시로 나누어 숙소 예약을 해 둔 터라 이동 동선을 잡는데 기준이 되었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해설사님의 스토리텔링은 제주만의 궁금증을 예습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제주 여행을 계획한다면 우선순위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해설사님과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어디서나 마주치는 제주의 오름은 총 360여 개나 된다. 그중에서 새별오름은 3월에 열리는 제주 들불축제 장소로 유명하다.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진행되는 그곳에 우리가 있다는 행운을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규모 축제라는 기대감에 몰려드는 차량으로 일찍부터 북적였다. 제주 농악대 전체의 멋진 풍물 대행진은 우리 가락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잔뜩 끌어올렸다. 하지만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오름 불 놓기는 본격적인 행사 직전에 전국적인 산불 위험 경보로 취소되어 아쉬웠다. 예상치 못한 제주의 바람은 순조로운 행사 진행을 흔들 만큼 불안하고 세찼다.
불꽃으로 밝히지 못한 어둠을 뒤로하고 성이시돌목장으로 차를 돌렸다. 관광객을 위한 토요일 밤에만 진행하는 ‘별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새미은총의 동산 야외에서 어둠과 함께 시작된 미사는 스포트라이트가 제대를 비추는 묘한 몰입감으로 엄숙함까지 더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지만 흐려진 하늘에 바람조차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촘촘한 별을 목격하리라는 기대감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별오름에서의 아쉬움을 달래 주는 벅찬 감동이 찾아왔다. 휘리릭 세찬 바람이 몰아치더니 옅게 드리운 구름을 걷어냈다. 그토록 바라던 촘촘한 별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늘이 허락한 것이다. 돗자리와 담요 한 장으로 미사 중간중간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건 제주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친구와 나의 커진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같은 날 다른 느낌으로 나타난 바람의 기억은 우리에게 더 특별했다. 새별오름 축제는 바람 때문에 아쉬웠지만 별별미사는 바람 덕분에 고마웠다.
‘삶은 우연이고 인생은 운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도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세상이 만들어 낸다. 제주 한 달살이와 더불어 새로운 인생 2막의 시간이 어떻게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기분 좋은 운이 언제든 건너올 수 있도록 마음속 파란 긍정 신호등을 항상 켜둘 뿐이다. 다시 제주의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