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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은 색이 아니다 1

나는 "아마도"로 말한다

by 이재우

1. 회색의 발견

어느 날부터 "아마도"라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나조차도 이상하게 여겼다. 왜 나는 확실한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왜 항상 여지를 남겨두려 하는 걸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다. "너는 왜 항상 아마도, 아마도 하니?" "좀 더 확실하게 말해봐"

"자신감이 없어 보여" 같은 말들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나도 그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유부단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뭔가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내가 "아마도"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감의 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복잡하고 변수가 많은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2. 변수가 많은 세상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팀장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회의를 열었고, 여러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 프로젝트 언제까지 완료될 것 같나요?" "예산은 얼마나 들까요?"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동료들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예산은 정확히 이 정도면 됩니다" "성공할 겁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넘쳤다. 반면 나는 "아마도 한 달 반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예산은... 아마도 예상보다 조금 더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팀장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고, 동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에 위축되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이 계속 바뀌었고, 예상치 못한 기술적 문제들이 발생했다. 시장 상황도 변했고, 경쟁사의 움직임도 예측과 달랐다. 결국 프로젝트는 두 달이 걸렸고, 예산도 처음 계획보다 많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확신했다. 내 "아마도"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분석해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런 상황에서 확신에 찬 답변을 하는 것이 과연 정직한 것일까?


3.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시절

물론 나도 가끔 상상하곤 한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은 내 모습을 말이다. 회의실에서 당당하게 일어나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모습. 모든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모습.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강인한 리더가 되고 싶었다. 실제로 연습도 해봤다. 거울 앞에서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분명히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외쳐봤다. 하지만 그 말들이 내 입에서 나올 때마다 어색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나는 태생적으로 소심한 사람인가? 아니면 경험이 부족해서 자신감이 없는 것인가? 하지만 점점 다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4. 회색의 삶

나의 삶은 좋든 나쁘든 회색이다. 명확하지 않지만 은은하며, 화려하지 않지만 포근한 그게 나의 삶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극단적인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밝은 색깔보다는 차분한 색깔을, 너무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조용한 멜로디를 선호했다. 친구들이 확실한 좋아함과 싫어함을 표현할 때

나는 항상 "괜찮다"거나 "나쁘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런 성향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직장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모든 상황에서 나는 중간 지점을 찾으려 했다. 흑과 백 사이의 회색 영역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런 내 모습이 답답했다. 왜 나는 확실한

취향이 없을까? 왜 강한 의견을 내세우지 못할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나만의 특별한 시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색은 단순히 검정과 흰색이 섞인 색이 아니다. 회색 안에는 무수히 많은 톤과 뉘앙스가 존재한다. 밝은 회색도 있고, 어두운 회색도 있다. 따뜻한 회색도 있고, 차가운 회색도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문제들도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5. 나만의 배려

"아마도"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게 자신감이 없어서 혹은 어떤 정보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대화하는 사람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자, 나만의 배려이다. 친구가 새로운 사업 아이템에 대해 의견을 물어온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아이템은 성공하기 어려워 보였다. 시장성도 부족하고, 경쟁력도 떨어져 보였다. 만약 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건 안 될 것 같아"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친구는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대신 나는 "아마도 좀 더 시장 조사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아마도 다른 접근 방식도 고려해 볼 만할 것 같고" "아마도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라고 덧붙였다.


친구는 내 말을 듣고 스스로 더 깊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강요받지 않고, 상처받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그 사업은 시작하지 않기로 했지만, 친구는 나에게 고마워했다. "네가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면 기분이 나빴을 텐데, 여러 가능성을 열어둬서 고마웠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마도"는

단순히 애매한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배려의 언어였다. 확신에 찬 답변은 때로는 상대방의 생각을 막아버릴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상대방과 함께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6. 포근함의 힘

직장 후배가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조언을 구해왔다. 좋은 조건의 이직 제의를 받았지만, 현재 회사에서도 승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직하는 게 좋을까요?"

다른 선배들이라면 어땠을까? "당연히 이직해야지" 또는 "지금 회사에서 더 버텨봐"라고 확실한 답을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아마도... 두 선택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 같아. 이직을 하면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지금 회사에 남으면 아마도 안정감 속에서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후배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아마도... 네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아. 그 답은 이미 네 안에 있을 거야."


후배는 며칠 동안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나중에 말했다. "처음엔 선배가 확실한 답을 안 줘서 답답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좋았어요. 제가 스스로 결정한 거라서 후회가 없어요."

그때 나는 내 "아마도"의 진짜 힘을 깨달았다. 그것은 포근함의 힘이었다. 강요하지 않고,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감싸주는 따뜻함. 확신보다는 이해를, 명령보다는 제안을 택하는 부드러움.


7. 회색의 깊이

사람들은 회색을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색깔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회색 속에서 무한한 깊이를 발견한다.

미술관에서 회색 그림들을 볼 때면 항상 감동받는다. 흑백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그 깊은 감정들, 수묵화에서 표현되는 은은한 아름다움. 그 모든 것들이 회색의 힘이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성공도 없고, 극적인 실패도 없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나는 소소한 행복들을 발견한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의 향, 동료와 나누는 잔잔한 대화, 퇴근길 석양의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내 회색 인생의 소중한 조각들이다.

"아마도" 역시 그런 회색의 언어다.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성을 품고 있고, 강하지 않지만 따뜻함이 있다. 그 안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겸손함이 담겨 있다.


8.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

요즘 세상은 빠르다. 모든 것이 즉각적이어야 하고, 확실해야 하고, 강력해야 한다. SNS에서는 강한 의견들이 순식간에 퍼지고, 모호한 표현은 약함으로 여겨진다. "아마도"같은 말은 이런 세상에서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내 속도를 지키고 싶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급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동료들은 빠르게 의견을 내놓지만, 나는 여전히 "아마도"를 붙인다. "아마도 이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관점에서도 한번 검토해 보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이런 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까 걱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료들이 내 의견을 더 귀담아듣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아마도"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 불확실성이 오히려 팀 전체의 사고를 더 깊게 만들었다.


9. 상처받지 않는 대화

"아마도"라는 말이 가진 또 다른 힘은 갈등을 줄인다는 것이다. 확신에 찬 말들은 때로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상처를 준다. 하지만 "아마도"는 여유를 만들어준다.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요즘 같은 시대에 정치 이야기는 자칫 관계를 망칠 수 있는 위험한 주제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를 앞세워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아마도 이 정책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을 것 같아" "아마도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상대방에게 발언 기회를 넘기면. 오히려 더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연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넌 항상 그래" "넌 절대 안 변해"같은 확정적 표현들은 상대방을 상처 주고 관계를 악화시킨다. 하지만 "아마도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 "아마도 우리가 서로를 더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면 훨씬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10.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기만 한 회색이겠지만, 나는 그런 나의 포근함을 지켜내고 싶다. 세상이 흑백논리를 강요하고, 확신을 요구해도, 나는 내 방식을 유지하고 싶다. "아마도"라는 말속에는 내 철학이 담겨 있다. 세상은 복잡하다는 것, 모든 문제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는 것, 사람은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런 인식들이 내 "아마도" 속에 녹아있다.


가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좀 더 강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때마다 답은 같다. 나는 나다운 방식으로 살고 싶다. 강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큰 소리를 내는 강함도 있지만, 조용히 버티는 강함도 있다. 확신에 찬 강함도 있지만, 불확실함을 인정하는 용기도 강함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11. 아마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아마도"라고 말한다. 내일 날씨를 묻는 동료에게 "아마도 비가 올 것 같아요"라고 답하고,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묻는 상사에게 "아마도 잘 될 것 같습니다만, 몇 가지 변수들을 더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것이 나만의 정직한 표현이라는 것을. 세상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나를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라"라고 조언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마도"를 부끄러워하지 말아도 된다는 것을, 그것도 하나의 훌륭한 소통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아마도"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목소리보다는 배려 깊은 마음을, 강한 주장보다는 열린 대화를 선택하면서.


아마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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