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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Jan 27. 2024

00100

나 혼자 노래방

 노래방 곡번호는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더 이상 두꺼운 노래방 책 속 원하는 곡번호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만, 문득 리모컨 예약 후 화면에 표시된 곡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30177, 지금처럼 주로 다섯 자릿수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 함은 당연히 한자리 수도 있었다는 의미고, 모바일 차트에 매일 '최신발매' 카테고리가 새로워지는 것을 보아하니 금세 여섯 자릿수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됐든, 이제 전주가 지났으니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번에는 제발 빵점은 아니어라.  


 그날은 유독 회사에서 진이 잔뜩 빠진 날이었다. 새해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출근일이었으므로 퇴근 후 바로 본가에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당일 안에 필히 마감해야 할 업무가 있던 지라 시외버스 표도 넉넉하게 늦은 저녁 시간으로 예매해 두었건만, 일찍 출근한 게 무색하도록 오전 시간이 쏜살같이 달아났다. 타 부서에서 자료를 받아야만 완성할 수 있는 절차여서 출근 무렵부터 바삐 전화를 돌렸다. 유감스럽게도 이제야 해당 역무를 기억하고 회신 주시겠다는 분들이 더럿 있었다. 본래 요청드린 마감 일자는 이미 지났고, 이미 한 차례 리마인드 메일도 보내드렸었는데. 그 상황이 화가 나기보다는, 우리 회사 부서 중 이곳과 이곳이 연말에 한창 성수기구 나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다른 날이면 몰라도 연말이다. 누구라고 이 날 휴가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자, 저희 말일까지 야근은 비참하니까 같이 으쌰으쌰 해봐요'라는 정신으로 무장해 빠르게 공란 부분들을 채워나갔다. 그날 점심을 팀원들과 먹었는지 작업한다고 혼자 먹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찌 됐든 오후 3시 즈음 문서를 완성, 한 시간 내 상부 보고 및 승인을 받고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향했다.


 장시간 집중 에너지를 발휘해서인지 추운 날씨에도 볼은 잔뜩 상기되고 머릿속은 멍했다. 너덜해진 스스로에게 혼자만의 회복 시간을 주고 싶었다. '수수료보다 시간이 금이다'라는 평소 생각과 달리, 그날은 버스 시간을 앞당기는 것에 대한 변경 수수료를 내기가 아까웠다. 이미 한 차례 가슴 졸이다 왔는데 또다시 버스 타는 곳까지 조급하게 가긴 싫다. 연말 두 시간 휴가 낸 셈 치고, 무계획으로 시간 보내다 타겠어! 이렇게 다짐한 뒤 차는 집 주차장에 두고,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평소라면 네이버지도로 배차 시간을 확인해 집 앞 버스 정류장 두 곳 중 더 빨리 오는 곳을 골라 버스를 탔을 거리다. 하지만 오늘은 나에게 시간 쓰는 날이다. 내가 게임 속 캐릭터라면 상단 알림 창에 '1시간을 도보이동에 소모하였습니다'라고 떴을 것 같다고 상상하며 걸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추운 날씨에 코를 훌쩍이다 장갑과 목도리를 껴기도, 가수 임영웅 씨 콘서트로 인해 북적이는 콘서트장 앞을 지나갔다. 그러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혼자서 코인노래방 가기에 30분을 소모하였습니다'를 가상의 알림 창에 표시하고 싶어졌다.


 중학생 때까지는 시험 끝나면 다 같이 우르르 노래방에 갔는데, 고등학교에서 친해진 친구들과는 썩 기회가 없었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고, 계속해서 노래방에 가지 않다 보니 모처럼 소수 인원과 가게 된 날이면 어떤 곡을 불러야 할지 난감해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곳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지인들과 비교해 확연히 낮은 성량으로 가사를 읊조리다, 끝내 노래점수가 '0점'을 기록하는 경험도 하게 된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0점 나오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마이크가 내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위로해 주었지만, 그 말에도 한번 떨어진 자신감은 반주를 뚫지 못했다.


 지나온 나날들에 도전장을 던지는 마음으로 노래방이 있는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비교적 짧은 시간 단위부터 결제 가능한 코인 노래방임에도 불구하고, 내 예상과 달리 '곡수'와 '시간'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어떤 노래를 부르다 그만두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24분의 시간을 3000원으로 획득했다.


 낮은 음역대부터 시작해 보자는 생각으로 또박또박 '2am-친구의 고백'을 불렀다. 작은 공간에 내 목소리가 오롯이 채워진다는 것. 듣는 이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인지 나쁘지 않았다. 울림이 있으니 제법 잘 부르는 것 같네라 생각했건만, 0점이 나왔다. 아니 나 그래도 음치라는 소리는 안 들었는데. 음역대가 안 맞아서일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한 후 한때 애창곡이던 '태연-들리나요'를 틀었다. 이때 30177 곡번호가 눈에 들어온 걸 보아하니, 이미 당황감에 노래에 집중할 수 없었나 보다. 그리고 다시 0점을 마주하고 나니, 노래방 기계의 고장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도 연속 0점이 나온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계속될 바에야 평소 안 부른 노래를 불러보자. 최근에 떠올라 반복해 듣던 '윤하-Hero'의 비장한 전주가 흐른다. 태연에 이어 윤하라니. 배와 마이크를 쥔 손에 잔뜩 힘을 주고 고음 파트를 질렀다. 이어서 무엇을 불러볼까 생각하던 차, 뜬금없이 기계 화면에 숫자 100이 떴다. 0 두 번 나왔다고가 아니라, 진짜 일공공 백점! 정말 예상치 못했어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다.


 그 뒤로 '노래는 기세다'라는 마음으로 '윤지영-언젠가 너와 나', 'qwer-디스코드', '키네틱플로우-몽환의 숲'을 불렀다. 디스코드는 'D선상의 아리아' 부분 부르다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 같아 중간에 멈췄다. 덕분에 추억의 랩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요즘 노래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랩 있으면 좀 외워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개인적인 만족도가 가장 높았다. 노래방을 나온 이후에도 시간이 남아 혼자서 인생네컷도 찍었다. 아이템은 카우보이 모자, 자전거모양의 안경 등 다채롭게 시도해 보았다. 앞서 촬영한 누군가가 뒷배경 천을 올려, 본래 색상이 아닌 짙은 회색 바탕에서 촬영하긴 했지만 사진 프레임을 화려한 것으로 골라 전반적으로는 균형감 있었다고 자평한다. 그날 하루만 돌이켜도, 넓혀서 2023년 한 해를 회상해도 항상 그런 식이었다. 뻔하게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공존한다. 0점부터 100점까지 다 맛보았으니 조금은 담대하게 2024년을 경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00100', 1을 중심으로 대칭이자 나의 노래방 경험기를 담은 숫자가 썩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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