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이 수첩에 적은 글을 쭉 읽어보았다. 작년 회사에서 팀을 옮기고 적응 중 힘들었을 때, 몸이 아파 점심마다 꾸역꾸역 병원에 방문했던 때, 좋아하는 회사 선배가 떠났다는 사실이 유독 서럽고 그리울 때, 재테크해보겠다고 읽은 경제분야 책에서 참고할만한 내용을 발견했을 때, 애인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문장을 부여해보고 싶을 때, 올해 목표한 철학분야 책을 읽다가 도무지 기록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그때마다 나는 이 수첩을 펼치고 글을 썼다.
어제는 2022년 5월부터 사용했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세줄일기>를 쭉 읽고 삭제했다. <세줄일기>는 이름 그대로 날마다 글 쓸 공간으로 세 줄만 주어진다. 분량이 제한돼 있어 다 채워야 한다는 부담이 적을 것 같아 여러 일기 어플 중 선택했다. 간혹 세 줄 분량에 담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추가로 더 쓸 수 있는 기능도 있지만, 그렇게 쓸 경우 저장 시 한 번에 그 페이지에 표시되지 않고 특정 아이콘을 눌러야 '더 보기' 형식으로 세 줄 이후 글이 나오기 때문에 가급적 지양했다. 그래서 끝 문장이 '좋았', '휴', '해냈', '일단 해' 등으로 어미를 생략하거나 갑자기 반말로 끝나는 날들이 있다. 대신, 어릴 적 그림일기 형식처럼 위에 빈 공간이 있어 그곳에는 사진 첨부가 가능하다. 덕분에 일기를 쓰기 전 내가 오늘 이런 사진을 찍었구나 다시 상기할 수 있어 좋았다. 아무튼 원래라면 사용 종료 전 pdf로 변환해 저장하고 싶었는데, 그것은 멤버십 가입자만사용 가능한기능이었다. 더 이상 이 글을 찾아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약간 망설였으나, 돈을 내고 보관한다고 꼼꼼히 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당장 어제도 처음에만 한줄한줄 읽었지 나중에는 웹툰을 내리는 손가락 속도로 빠르게 다음날들로 넘어갔으니까.
일기란 참 이상하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날의 경험과 감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래서인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었을 때 의아한 지점이 생긴다. 1번. 저 때 분명 힘들었는데 왜 저렇게 좋은 구석을 억지로 찾아내려 하지? 2번. 내가 저 때 저렇게 힘들어했다고? 그런데도 하루 끝에 일기를 남겼구나. 일주일 사이 '괜찮다, 할 수 있다!'와 '나 사실 안 괜찮다, 자신 없어......'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과정이 조금은 웃겼고 많이 안쓰러웠다. 그때 노력했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빚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마움 대신 괜히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다.저렇게까지 안 했어도 됐는데, 지나고 보면 사실 그렇게 큰 고민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다 잘 풀릴텐데. 그리고 이미 너는 지금의 내가 부러워하고 그리워할다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유명 영화 제목과 반대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로 지난 일기 기록들을 바라봤다.
얼마 전 새로 알게 된 팟캐스트 채널에서 진행자들이 '글쓰기'를 주제로 삼은 회차가 있었다. 글쓰기가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피드백 없이 계속해서 혼자 글을 쓰다 보면 오히려 그 생각에만 갇혀버릴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한 상담 전문의의 소견을 근거로 들었는데, 수긍이 가는 지적이었다. 나도 분명 글을 정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약간씩 실제와 다르게 각색하게 된다. 한 문장씩 만들고 스스로 읊다 보면그 글에 근거해 기억이 다시 조립되기도 한다.
어제 일기 앱을 삭제하고 오늘 이 글을 쓰는 것은, 일기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겠다는 다짐에서다.<세줄일기> 덕분에 하루가 끝날 때마다 그날 좋았던 순간들을 하나 이상 떠올렸다. 그러나 그 일기의 감정이 그날의 전부인가? 주된 감정인가? 되묻는다면 아닌 날들도 많았다. 결국 나는 이 일기를 쓰게 된 목표, '평범한 하루에도 행복한 일은 있으니 그걸 잘 기억하자'를충족하고자 어떻게든 좋은 순간을 찾아 기록하려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글이 아닌데도 또 하나의 SNS처럼 스스로 검열 후 그날을 마무리 지었다.(참고로 <세줄일기>는 인스타그램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비공개 계정으로 이용할 수 있다. 나의 경우 비공개 계정으로 2년여간 작성했다.) 과거 나에게 필요했던 하루 마무리가 일기였다는 건 변함없다. 다만, 이제는 일기가 아니더라도 머릿속에서 그날의 좋았던 일을 상기하고 스스로 다독이는 습관이 생겼다. 따라서 세줄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글을 쓰고 싶을 때 더 긴 호흡으로 정렬하고 싶다. 혼자서만 읽든 누구에게 보여주든 결국 그 순간의 감정을 오롯이 담기란 어렵다는 것을 납득했다. 사실을 추구해도 진실이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글쓰기의 매력이자 글쓴이의 숙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준다는 게 조금은 덜 어색해진다. 601페이지에 이른 지금, 어떤 날들은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매일 쓰지 않는 일기도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