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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지인 Dec 26. 2023

김유정 선생님께

영화를 보고 편지를 씁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선생님, 그거 아세요?


연예기사에 나온 고현정을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과 국민학교 동창이었다는 고현정은 볼 때마다 기묘한 느낌을 지을 수가 없어요. 뱀파이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피부는 윤기가 흐르다 못해 광채가 납니다. 분명 꼬꼬마시절,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본 고현정인데, 저보다 더 옛날사람임이 분명한데, 제가 불혹의 나이가 된 지금까지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그녀는 그때와 같은 모습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더 늙어 보이는 것도 같아요.

나이는 저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고현정보다 지긋하게 나이 들어 있을 선생님의 모습이 기대됩니다. 너무 보고 싶은 나의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저는 지금 영락없는 17살, 고1입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저는 선생님의 결혼기념일을 알고 있어요. 2000년 12월 10일에 결혼하셨잖아요.선생님의 결혼식에 참석도 않은 제가 어떻게 아냐고요. 너무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엄청 울었어요.

 사실 그날은 저의 스무 번째 생일, 성인의 문턱에서 맞이한 최악의 생일이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생일이 지나가기를 바랐어요. 00학번이 되어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등록금 때문에 한 학기 만에 휴학해야 했어요.

 

십 대 시절 내내 가정형편은 점점 안 좋아졌고, 부모님의 불화도 점점 깊어갔고, 남동생의 방황도 점점 심해졌지만 그게 하필 스무 살에 가장 최악으로 치달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십 대엔 학교에 있는 동안은 그 사실을 잊고 지낼 수 있었지만, 대학교는 무료로 다닐 수 없잖아요.

 제게 학교는 단순히 학교가 아닌, 현실의 도피처 같은 곳이었나 봐요. 세기말에 수능을 치르고, 밀레니엄학번이 되어 캠퍼스의 낭만을 맘껏 누리는 대학생이었다가 하루아침에 휴학생 신분이 되어 맞닥뜨린 현실이 버겁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20대를 맞이했어요. 가장 춥고 무섭고 불안한 그 해 겨울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우리 선생님의 모습이 얼마나 예뻤을까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참석 못한 선생님의 결혼식이 안타까워서, 스무 살의 생일에 한없이 울고 있던 제가 너무 안쓰러워서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 저는 스무 살이 됩니다.



선생님, 기억나세요?


대방역에 있던 선생님댁에도 놀러 가고, 강촌에도 갔었잖아요. 경진이, 효정, 송화, 재미, 저 그리고 선생님 이렇게 여섯이서 새마을호를 타고 기차여행을 떠났었죠. 담임선생님과 강촌으로 기차여행을 했다고 하면, 그 누가 믿어줄까요?


학교선생님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공교육의 몰락이니 뭐니 떠들썩한 작금의 시대에 더 놀랄만한 얘기겠죠. 이제 그때의 선생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어른이 되고 보니, 그렇게 휴일에 자기 집에 놀러 오게 해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주셨던 선생님이, 주말을 반납하고 함께 여행을 가준 선생님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단지 가르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 해도, 그중 열에 아홉은 하기 싫은 일이라는 것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저와 마찬가지로 선생님께도 그때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에요.



선생님, 그거 아세요?


그렇게 친하게 뭉쳐 다녔던 1학년 성반 저희 다섯이 어떻게 되었는지요.


 영종도에서 배가 안 떠 전교생 중 유일하게 입학실 첫날 지각을 했던 송화는, 저희 중에 유일한 대학원생, 가장 고학력자가 되었어요. 아이러니하지요. 송화는 수업시간에 항상 졸아서 수학선생님의 분필을 맞던 학생이었으니까요. 물론 깨어있는 동안에도 공부는 하지 않았죠. 왜 대학원까지 갔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요. 학력과 경제력의 상관관계를요.


 송화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 80만 원의 박봉을 받으면서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에도, 서울 오피스텔 원룸에서 월급보다 비싼 월세를 내며 출근하는 것을 보며, 경제력과 출퇴근거리의 상관관계를 알게 되었죠.


그럼에도 제가 아직도 송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한결같음이에요. 영종 말우물고개에 살던 송화는 이제 하늘도시에 사는 애 둘 맘이지만, 이 나이에도 한결같이 철딱서니 없고 유쾌하죠.구김이 없어서요. 그렇게 마음의 구김살과 경제력의 상관관계를 깨닫는 순간, 제 맘 속엔 슬며시 의구심이 피어올랐어요. 불로소득보다 근로소득이 대부분인 저도, 과연 제 아이들을 마음의 구김살 없이 자라게 해 줄 수 있을까 말이죠.


자가아파트와 자가용 한 대, 1년에 한 번씩 다니는 해외여행으로, 저는 스스로 중산층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어요. 하지만 집값은 떨어지는데 금리가 폭등하고, 사교육비지출이 높아지면서, 매달 말 카드값 걱정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자 그것이 허울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순간, 저는 구김살이 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얼굴에도 그리고 마음에도요.

 송화처럼 한결같이 유쾌하게 사는 것은 실로 꽤 힘든 일이었어요. 아직도 송화는 철딱서니 없을까요. 그 누구보다 송화가 철들었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요.



선생님 그거 아세요?


경진이네 검단 아파트가 무너졌다는 사실이요. 2년 전, 무려 애넷맘인 경진이는 다자녀 혜택으로 검단 신도시에 LH아파트를 분양받고 너무 행복해했었는데, 하필 그 아파트가 무너지고 말았어요.

 20년 전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을 뉴스로, 마치 영화장면처럼 무감각하게 보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생활의 터전인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 거꾸로 가고 있는 세상, 경악스러운 현실에 더는 화낼 힘조차 없네요.

 남에게도 이게 지금 현실인가 싶은 일인데 당사자인 경진이는 오죽했을까요. 하지만 그 당사자의 마음을 직접 전해 들은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젠  더 이상 경진이와 연락하고 지내지 않거든요.


선생님, 30년 된 친구와의 절교는 생각만큼 비극적이고 가슴 아프지 않았어요. 왜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됐을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그냥 그런 때가 된 것 같았어요. 덤덤했어요.

 당장 오늘의 저녁거리를 궁리하고 애들 숙제를 봐주는 일상에 치어 살다 보니 감정이 무뎌진 걸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젊었을 때라면 일생일대의 사건 같은 일들도 나이를 먹고 보니 ‘삶의 반칙선 위에 점일 뿐이야~‘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요.


 물론 가끔 궁금하기는 해요. 하지만 다시 연락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할만한 에너지가 제겐 없어요. 어느 순간 에너지낭비라 느껴지는 관계를 끊어낸 건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말이죠. 생각해 보면 엔간히 나이를 먹고,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운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 에너지가 석탄에너지처럼 내게 한정된 자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저의 에너지를 정말 필요한 순간에 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쓰기로 했어요. 친구 한번 만나는 일도 점점 녹록지 않은 중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즐겁고 밝은 일에 쓰고 싶어요. 안 그래도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은 점점 많아지지만 체력은 딸리는 그런 나이가 되니 관계에 집중하는 것도 다 한때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만큼 제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의미이겠죠. 분명 예전보다 만나는 사람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삶은 더 꽉 채워진 느낌입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효정이는 아직 미혼이에요. ‘나는 솔로’ 출연을 꿈꾸며 꾸역꾸역 출근하는 K-직장인, 하지만 그 와중에 필라테스 지도자과정까지 따냈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헬스에 배드민턴에, 주말에는 저랑 등산까지 다녀요.


항상 지금이 20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효정이에게 저는 요즘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어요. ‘너는 아직 20대야‘라구요.


 너는 아직 사람들이 너를 찾잖아. 주말에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잡잖아. 그러니 너는 아직 20대야 라구요. 불혹의 나이 사십,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지만, 나를 유혹하는 것도 없다고.

슬슬 나를 찾는 사람도,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어지는 느낌이고,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고, 아무리 젊게 지내려고 해 봐도, 트렌디한 패션아이템을 걸치고 헤어스타일을 바꿔도 영 young 해 보이지 않고 푸석해지는 피부만큼이나 시들어가는 느낌이라고. 점점 나를 찾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이제는 내가 먼저 찾지 않으면 만날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말이에요.


 그래도 ‘나 혼자 사는’ 효정이가 사실은 친구들 모르게 자신의 오피스텔에 우렁이 남편이라도 데리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 함께 해발 1200미터가 넘는 산을 완등하고 나면 무릎이 시큰해지다 못해 코끝이 찡해지고, 온몸이 녹초가 되어 흐물흐물해지면, 그럴수록  남편과 아이들,  강아지까지 북적대는 정신 사나운 나의 집일지언정 얼른 귀가해 함께 따뜻한 저녁식사를 하고픈 맘이 간절해지기 때문이에요. Home sweet home이 별건가요. 지지고 볶는 평범한 나의 일상이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무자식이든 유자식이든 어느 쪽이 상팔자인지는 모르겠고, 결혼했든 결혼하지 않았던 인생은 자칫 무덤이 되기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진짜 어른이 된 기분입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재미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 고졸 이후로 한 번도 소식을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일 거라 생각해요. 당연히 재미의 기억 속에, 나의 기억 속에 우리는 항상 자라지 않은 열일곱 소녀 그대로의 모습일 테니 말이에요.

 

피천득 님의 ‘인연’의 그 유명한 마지막 구절처럼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재미와는 수필 속 아사코와 같은 그런 사이까지는 아니지만 일생을 잊지 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사는 그런 사이로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저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겉으로 티는 안내지만 ‘무탈‘이라는 말에 매우 집착합니다. 그건 아마도 2014년 4월 16일부터 인 것 같아요.


그때 전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로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분명 해상에서 배가 침몰됐지만, 400명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분명히 들었어요.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것이 오보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모든 공중파에사 정규방송을 중지하고, 인양된 시신을 카운트하는 뉴스를 실시간으로 내보내면서, 그 지옥도를 실시 간으로 무기력하게 목도해야만 했던 후였죠. 그리고 그 이후로 코로나의 긴 터널을 겪으면서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세상 속에서 개인이 각자도생을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보냈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잘 지켜냈다는 것의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 고로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감사함, 무덤덤하게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가는 우직함을, 보통의 날들의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과연 반듯한 어른으로 잘 자라난 걸까요.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고, 주변사람들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그런 반듯하게 자란 사람 특유의 다정함은 하루이틀에 쌓이는 것이 아니어서 타고난 지능보다 더 갖추기 힘든 자질이라는 것을, 반듯하게 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풍성하고 숱이 많았던 긴 머리가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러실까요

나이를 많이 먹어서도 피부 좋고, 머리숱 많고, 반듯한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부단히 자기 자신을 아끼고 돌봐야 한다는 것을, 마흔이 넘어도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 깨닫게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아직 성장하는 중일까요.


그래도 선생님에게는 항상 1학년 성반 부반장 열일곱 인 저로 남아있고 싶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 성적과 입시로 고민하지 말고(공부로 먹어주는 것도 다 한때라는 걸), 부모님이 싸운다고 고민하지 말고(결국 부모님은 이혼한다는 걸), 교우관계로 고민하지 말고(그중에 대부분은 안 보고 지낸다는 걸), 효정이와 경진이와 송화와 재미와 더 많이, 더 즐겁게 놀면서 다시 오지 않을 십 대를 온전히 누리며 보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이만 줄일게요



1997. 제주수학여행 /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IMF가 터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금의 250만 반려묘 시대를 예언한 시대를 앞서간 영화


동인천 지하상가, 월미도, 제물포 불가마, 차이나타운, 북항, 주안 등등 인천 올로케이션 촬영으로 인천토박이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영화 속 공간들. 그리고 내 또래 주인공들의 불안과 방황, 청춘과 우정을 담아 마치 자화상 같은 영화였던 ‘고양이를 부탁해’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우면서도 맘이 저릿했다. 이 영화를 꺼내 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그 감정소모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영화 보기를 미루고 미루다 재관람했다. 오래된 필카앨범을 보는 것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귀하디 귀하고, 찬란할 정도로 눈부시다. 내게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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