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비비기가 전부는 아니니까
명분 너머의 교내 정치
12월은 교직 사회에서 꽤 건조한 시기이다.
일부 선생님들이 관내, 관외로 내신서를 작성해 이별을 앞두게 되고,
교육과정평가회나 대토론회와 같은 공개회의에서 그간 학교에 대한 불만사항이 터져 나와 분위기가 가라앉기 때문이다.
거기에 업무분장 조정 회의와 업무희망원을 제출하는 시간을 보내면 더 바삭해진달까.
18년 동안 학교에 근무하며 경험한 다섯 개의 학교 중 체계와 분위기가 같은 학교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도 이쯤은 해야지, 그래도 우리가 교사 집단인데, 하는 양심이 작동하는 그 어떤 지점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양심 속에 조금 더 양보하는 사람, 조금 더 이해하는 사람을 나는 선배님이라 부르고 존경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어떤가.
나는 야생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큰 교무실에 근무하며 바라본 부장들의 비겁함과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강약약강의 야생의 생태와 다르지 않았다. 양심도 양보도 이해도 없는 동물적 상태였고, 관리자는 힘들어하는 담임들과 부서 계원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적은 일감을 가져간 부서에 대한 불만이 부서별 협의회에서 공통적으로 터져 나왔지만, 그 불만들은 관리자의 귀로 들어가 반대편 귀로 그대로 빠져나왔다.
말한 사람들은 패배주의에 젖어 갔고 무력감으로 휩싸였다.
잘해보자고, 더 효율적으로 일하자고 전한 의견이 메아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피드백은 없었다. 아, 있었나.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런 학교에서 물밑 정치와 손바닥 비비기는 꽤나 효과적이다. 관리자가 선생님들의 불만을 무시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관리자와, 관리자와 친한 부장들에게 손바닥을 비비는 교사 인간이 꽤나 많다.
평균 연령이 꽤나 높은 이 큰 학교에 존경할 선배 교사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힘든 일을 함께하며 으쌰으쌰 할 사람이 없는 것은 내 1년 인생의 삼분의 일이 외롭고 괴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야생에 던져진-그것도 사막의 야생-채로
업무희망원 한글 파일을 화면에 띄운다.
나와 일하고 싶다고 넌지시 이야기하던 부장들의 목소리가 맴맴 돈다. 나의 희망을 궁금해하던 다른 선생님들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이 야생의 학교에서 비담임을 하고 싶은 건 모두 같을 것이다. 일이 적은 부서로 가고 싶은 것도 모두 같을 것이다. 더 힘든 사람, 더 고통을 겪은 사람이 해야지. 정치가 아니고, 손바닥 비비기가 아니고.
바른말을 몇 번 웃으며 하는 것으로는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황량한 큰 교무실에서
커서만 외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손바닥 비비기가 전부가 아닌데.
바른 소리가 먹히는 학교 사회를 만드는 게,
내년엔,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