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0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지만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8년을 다닌 회사를 떠나는 송별회는 회사에서 이미 전 직원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렀지만 법적으로 정해진 나의 정년퇴직일은 생일이 들은 달의 말일인 9월 30일이었다. 38년의 샐러리맨으로 살았던 삶이 마무리되는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작지 않은 날이었지만 그저 담담하게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다음 날이 되면 실업급여를 받는 1년 차 은퇴자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정년퇴직자들이 퇴임식을 마치고 나서 하는 일은 아마도 여행일 것이다. 직장에 매여있는 바람에 자신이 가고 싶은 나라로 편안하게 여행을 다녀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꽤나 여러 번의 해외여행이 있었지만 대부분 출장이었던 나도 어디로 훌쩍 떠나볼 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결혼하기 전에 취미를 여행과 독서라고 적었던 낭만이 넘치던 청년의 여행 목적지는 결혼하고 나서 아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곳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아버지 뒤에 가려진 존재로 삼십 년 가까이를 살았고 내 또래 유부남들은 대부분 그랬으니 딱히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훌쩍 커버려 세상의 중심이 자기가 돼버린 아이들과 여고 동창생과 떠나는 여행이 더 재미있을 게 뻔한 마누라를 남겨두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여행을 뒤로 미뤘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생각과 아내와 약속한 해외에서 오래 살기가 아내의 퇴직 이후로 미뤄진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리어답터의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스마트폰을 누구보다 일찍 사용했고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추어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해서 사용한 나는 이제 스마트폰은 이제 단순한 문명의 이기 정도를 떠나 생존의 도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기본적인 기능을 잘 사용하는 사용자였을 뿐이었다. 현직에서는 IT부서를 운영하는 직책을 맡았지만 회사의 업무는 여전히 윈도우 PC를 기반으로 개발 및 운영되었기에 스마트폰은 그저 메일과 메신저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스마트폰에서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은 회사의 IT 환경에서는 보안 때문에 사용하지 못했기에 자연스레 나의 관심 밖으로 멀어진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유튜브며 인스타그램 따위의 소셜 미디어에 대한 사용도 단순한 소비자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미디어 자체를 만들어 내는 크리에이터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여유 시간이 생겼으니 소셜 미디어에 제대로 도전해 볼 차례가 되었다. 이로서 퇴직 후에 도전할 첫 번째 목표가 생겼다.
인터넷 검색으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시50+재단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중장년 세대의 생애설계, 직업교육 및 일자리를 지원하는 이 단체는 산하의 센터를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가장 관심이 갔던 유튜브 크리에이터 과정을 수강하며 단순한 소비자로 이용하던 유튜브 영상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여 유튜브 사이트에 업로드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어서 블로그를 만들고 운영하며 수익화를 하는 과정을 수강하며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블로그를 개설하고 관리하는 운영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기업의 IT 담당자로 살아온 30여년의 경력 동안에 경험하지 못한 다른 종류의 흥미로운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물론 이모티콘 만들기처럼 시작은 하였으나 나의 적성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중도에 그만둔 배우기도 있다. 이렇게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디지털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