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 시간 - 역도 4
터덜컹 달리는 열차 속에서 기우뚱 기우뚱 혼자가 됐다. 눈 앞이 화창해서 좀 더 썩은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여름의 교토는 화를 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이만한 곳이 없다. 38도 이상을 웃도는 그 질척거림과 뜨거움은 미쳐 나뒹굴게 만들었던 불만족의 질감과 온도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잘만 미친다면 한국에 돌아가 촬영할 인물과도 비슷한 결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결코 여름에 교토를 가지 않는다는 친구00상의 만류가 내가 마지막으로 뿌리쳤어야하는 것이라 여겨졌을 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꼬박 성실히 맥주를 채워넣었다. 다행히 모두 같은 찜통 안에서 벌겋게 익어 목 언저리까지 술로 벌게져도 자연스러웠다. 원일 모를 분노에 알딸딸도 하겠다, 신나게 곪은 나를 터트렸다. 보이는대로 꼬투리를 잡고 비아냥 거리고 힐난했다. 눈길 가는 곳곳이 어떻게든 꾸며져 있어 여백의 미는 쥐뿔도 모르는 곳이야, 정말 오까네 밖에 모르네 자본주의의 온상!!!, 등등 별 말 같지도 않은 것들로 다 툴툴 거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피자 도우 늘리듯이 매끄럽고 너른 마음을 가지고 싶어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지랄발광의 시작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꼭꼭 역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저 척.척. 살아지는 삶을 보고 싶었다.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묵묵히 이행한다고 알려진, 유난히 성실하고 개인적인 이들 틈에 기대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주체성이 없어진 이 하루, 일상 하나하나가 잘 말려 개 진 빨래처럼 정리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곳에 뿌리내려진 사람들에게서도 지저분하게 달라붙는 어떤 불쾌감이 보였다. 못 본 척 부정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괴로웠다. 다들 힘은 있으신가요? 하는 질문이 머릴 스쳤다. 이 질문이 떠오르자 현재 상태가 진단됐다. 단순하고 작은 이 깨달음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나는 내 삶을 지탱하거나 들어올릴 힘이 없었다. 다리 전체가 물렁거렸고, 나자빠져있었다. 땅에 눌러붙은채로 팽개친 짐들에 손만 대고 있던 것이었다. 히히, 이 생각에 더 짜증이나서 웃음이 났다. 개다리 춤을 추면서 화를 내는 그런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기민하게 알아채야하는 연기훈련을 5년이나 -물론 꼬박꼬박은 아니지만- 해놓고도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른다. 몇년째 나를 놓쳤을까.
나약함을 인정하니, 더 이상 여행을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이 한 문장만이 마음 속에 남았다. 이 한 문장을 꺼내려 여기까지 왔구나. 진실로 잘못된 좌표가 아닐 수 없었다. 동굴이라 여겼던 이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진짜 동굴에서 도망쳐 외딴 해변에서 슥슥 긁어 모은 흙을 덮고 드러누워있던 것이었다. 맥주를 마시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더 이상 지갑에 구멍 내면서 유난 떨지말고 돌아갈 것. 돌아가서 진짜 동굴, 내 삶에 다시 나를 놓자. 생각은 깊게 해봤자 수렁, 모르겠으면 그냥 움직여야한다. 이 작은 인생이 뭐가 특별히, 대단히 어쩐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건가. 그냥이다. 그냥 힘을 내고, 그냥. 그냥,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