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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borambo Jul 17. 2024

브금은, Attack/30 seconds to Mars

동굴 속 시간 - 역도 5.

  돌아와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다시 원숭이의 시간을 보냈다. 개다리춤은 나이 때문이니 정신을 무장하면 된다. 살아가야지, 부던히 살아야지. 이리로, 저리로 스스로를 끌어냈다. 타인을 마주할 때면 날아갈 것 처럼 가볍게 군다. 즐거움을 연기한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는 원숭이 같은 행동. 키키키키키ㅣㅣㅣ히히히히히 한참 웃고나면 불안과 나를 향한 웃음이 쌓인다. 원숭이 잘도 깔깔거리네.

 뭐,.. 이래도 어쩌랴 싶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심각한 일도 없었다. 종종 혼자 진정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회오리 감자든 뭐든 상관없다. 일상에서 할 도리를 다 하고 때가 되면 휘뚜루마뚜루 가면 된다,


  ...는 결연했던 정신무장은 2024년을 맞이할 때 쯤, 박살이 났다. 지구별 여행은 대한민국 밖에 못 해보고 우주로 빨려들어 간 아빠를 보며 위기감을 느낀 엄마를 안정시켜야 하던 때가 온 것이다. 아빠가 간 지 한 달 반만에 유럽부터 지랄발광 간사이 훼이크동굴탐험까지 댓번이나 지구를 돌고나니 엄마의 위기감에 도착했다. 지구는.. 둥글었다. 그 때의 나는, 아마 홀로 사는 월세인이었다면 쫓겨났을 만큼 구멍난 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 대한의 장녀 보람정 아닌가, sun자씨의 해외여행 정도는! 어?! 쿨하게 쏠 수 있단 말이야~! 쏠 수 있어~!!!

 ...카드로 긁고, 미친듯이 일 했다. 이 여행의 후폭풍은 무려 4개월 간 이어졌지만 30대 초는 젊은 나이구나 실감하는 요즘이다. 


 아무튼 정신없이 일 하고 돌아 온 어느 날, 현관에 무진장 큰 봉투가 놓여있었다. 이불을 버리나 싶어 열어보니 아빠의 옷이었다. 구멍이 나도 즐겨입던 옷, 아껴입던 옷 등등 잔뜩이었다. "이게 뭐지? 어쩌려는 거지?", "버릴려고. 두 봉이나 버렸는데도 끝이없다." 

?????????????????????? 

 내 분노는 트랙 위에 있었나보다. 엄마의 대답을 듣자마자 탕- , 스타팅 건 소리가 들렸다. 폭발하고 보니 모든 세포가 계주였다. 너무나도 갑자기 시작된 무한 이어달리기. 이렇게 빨리 돌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이 날 깨달았다. 왜냐고 묻는 질문에 별 시덥지 않은 대꾸를 다 들었다. 장농에 공간이 없어서 엄마 옷을 둘 자리가 없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 방, 제일 큰 붙박이장에 자리가 남아서 여행캐리어 까지 넣어두면서-, 누가 입냐 -바지 같은 건 모르겠지만 종종 동생과 내가 입어왔다-, 등. 


 결국엔,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안 좋다, 였다. 나도 안다. 사람만 사라진 공간에 있어야 하는 무게를. 물론 그 무게도 달랐을 것이다. 나에게는 멈춰있기를 바라는 방이었다면, 엄마에게는 움직이지 않는 방이었을 것이다. 삼 년에 다다를 시간동안 둘러 쌓여 있었다면, 어쩌면 엄마도 일본에서 압박감에 지랄 발광을 해대던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깔끔하고 깨끗하게 산뜻하게 가벼운 하루를 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어떤 배신감과 억울함에 치가 떨려, 엄마의 심정을 느끼면서도 무시했다. 더 솔직한 소리들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도 쏘아 붙이니까 내 남편 물건인데 내가 마음대로 못하냐, 반박했는데 그 말에 더 큰 억울함이 밀려왔다. 

 내 아빠였는데. 왜 내 아빠 물건을 함부러 버리려 드는 건가.

 인간 관계가 이렇게나 복잡하다. 우리는 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태도가, 생각이, 남겨진 것들은 정말로 주인 없는 물건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꼴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그래도 그때에 난 왜 인지 엄마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서도 뗀뗀함은 이어졌다. 하필이면 선택한 여행지가 활화산 분화구란 사실이 상징적으로 느껴져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여행에서 돌아 온 후, 불효도여행 카드값을 갚으며 옥죄던 올가미를 정리한다. 원숭이 연기가 언제부터 시작 된 것인지를 생각한다. 아빠의 장례식 때 부터 시작 된 쇼. 몇몇 이들이 엄마를 혼자 두지 말고 잘 챙겨드려라, 강하게 말 했던 것들이 여지껏, 몸을 칭칭 감고 있었던 것이다. 맞는 말이 었지만 대략 멍청-한 나는 그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행했다. 아니, 그럼 나는요???, 지금의 내게 자연스러운 이 물음이 몇년간 꾹 눌려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안 괜찮았고, 아직 안 괜찮으니까 괜찮아 질 때 까지 안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때, 장례식에서 부터 갈라서야 했다. 각자의 슬픔을 각자가 달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일어나는 건 스스로 해야 했다. 나는 내가 받은 충격을 모른 척하고 내 벽에 엄마를 가뒀고, 서로 일으켜 주려다 뒤로 나자빠진 꼴이 되었다.  

 


 꿀꺽꿀꺽 시원한 콜라 한 사발 한 기분이 든다. 이유를 알고 받아 들이고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이젠 모든게 간단하다. 종종 슬퍼하고, 열심히 마음 근육을 키우면 된다. 천년의 궁금증? 저리 비켜라 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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