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내년 전교임원을 선출한다는 공고가 학부모 알리미에 떴다. 나는 넌지시 "한번 해보는 게 어때?"하고 물어보고 말 요량이었는데 아이는 개선장군 같이 강용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곤 연설은 기세라는 둥, 타이밍이라는 둥, 연설 중 간단한 액션을 추가하는 게 좋겠다는 둥, 왼쪽 귀에서 반대쪽 귀로 그대로 나가 부슬부슬 떨어질 잔소리뿐이었다.
학교에서 입후보자 스스로. 본인이. 직접. 선거 벽보를 제작한다는 내용의 가정통신문이 내 앞으로 쓱 내밀어진 그 순간에 나는 홀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할렐루야"
슬그머니 전문 업체에 맡길 생각을 하는 나 같은 학부모를 감지한 학교 측의 선제대응이 놀라운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내 손은 하나도 거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조용히 한시름 놓고 쓰고 있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탭댄스 추듯 종종거리며 마저 써 내려갔다. 미안한 말이지만 선거 홍보물에 쓸 아들 이름 삼행시를 짓는 것보다 이게 더 나를 가슴 뛰게 했다. 아, 이만하면 완벽하진 않아도 잘 쓴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묘한 기대가 일었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숨 한번 고를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간 며칠이 지나고서야, 아이는 공약발표 영상을 녹화하고, 각 학급에서 소견발표 영상을 시청을 한 뒤, 전자투표를 하고, 당일 하교 전 개표결과까지 발표하는, 그야말로 논스톱선거를 치러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하교시간에 울리는 전화 벨소리.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의 신남과 쨍함이 묻은 톤이 아니었다.
"엄마, 나 떨어졌어..."
아,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위로의 정답 같은 게 있기는 할까. 짧은 침묵 속에 내놓았던 말은
"많이 속상하겠다. 그래도 괜찮아. 다시 또 해보면 되지"였다. 위로로 가닿길 바랬지만 거절당해 굳어버린 얼굴과 좌절감을 맛본마음을 몇 마디 말로 풀어내기엔 도리가 없었다.
며칠 뒤, 내 차례였다.
십 년이 넘도록 이른바 경력이 단절된 '엄마사람'인 나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서류합격 메시지는, 내 존재의의를 인정받은듯해서 무엇보다 기뻤다. 면접은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조로웠다. 예상질문 리스트 범위 내에 있는 질문들이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을 들어주는 면접관들 덕분에 그린라이트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오후 5시, 합격자에게 개별연락을 준다더니 약속된 시간이 지나 한 시간이 넘도록 잠잠하기만 한 핸드폰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놓친 알림이 있나? 문자가 스팸함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닌가? 뒤적여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아, 난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전날밤, 호박색 굵은 보석이 박힌 절대반지를 가운데 손가락에 끼는 꿈은 느낌이 참 좋았는데. (호박엿이나 먹어라 이거였나 보다.)
마음이 바닥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울컥 치밀어 오르기를 여러 번. 아무리 애를 써도 내 힘으로 안 되는 일 같고, 빈손으로 빈들을 걷는듯한 외로운 생각이 뒤섞였다. 아들, 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우리 모자는 사이좋게 미끄러지고, 떨어지고 나서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엄마 괜찮아,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다음에 또 해보면 되지."
아이는 본인이 들었던 대로 정직하게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당최 면이 안 선다. 머쓱한 낯에 그나마 '다음'이라는 게 있어서 그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미끄러지다, 떨어지다, 구르다, 넘어지다, 자빠지다, 낙방하다, 주저앉다, 무너지다, 탈락하다, 고꾸라지다.
그러고 보니, 제목을 정하느라 키보드 위에서 '미끄러졌다' '떨어졌다'를 놓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디다 미끄러지고 어디다 떨어졌다고 붙여 써볼 것인지. 미끄러짐과 떨어짐. 에너지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졌다. 아이의 속 쓰림이 나보다는 작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었다.
어찌 되었든 완벽보다는 완료해 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다시 일어나 걷게 했다. 그게 바로 오늘의 안타인 셈이다. 이번엔 혼자 빈들에서 걷는 게 아니라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공을 받아내고, 쳐내는 마음으로 함께 서있다. 야구경기에서 안타 하나가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순간을 종종 본다. 인생도 그런 작은 '맞아 나가는 순간'이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는 거겠지. 그게 홈런이면 좋겠지만 말이다.
아직 내 경기는 9회 말이 아니다. 이번엔 2루까지 뛰었다면, 다음 타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시 나를 들썩이게 한다. 다시 손에 배트를 들어본다. 다음 타석을 향해 또 뛰어볼 이유가 아직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