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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미 Dec 15. 2024

이걸 먹어 말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삼킨 검은 김의 역습

별안간 김 세트를 들고 퇴근 하다니.

이건 분명 우리집 세대주가 담고 있는 부서에서 연말 선물로 들려 보낸 것이 틀림없다. 결혼 12년 차쯤 되어보니, 예상 답안을 눈 감고 때려 맞춰도 타율이 괜찮.


1. 피곤에 찌든 그가

2. 퇴근길에 친히

3. 김 상자만 사서 귀가 했을리가 만무하니까.


김 상자를 부엌에 털썩 내려놓고, 그는 스위치 꺼진 로봇처럼 소파에 누웠다. 산타의 존재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 하는 두 형제의 소리를 가만히 듣더니 크리스마스가 코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나 보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아이들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로그아웃 된 건 아니었군.


그러고 보니 각종 기념일을 해당일, 바로 그 당일에 챙겨본 기억이 전무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꿈틀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온다. 신혼 초에 맞이한 시어머니 생신날, "식사는 미리 했으니 이만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겠다"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목도한 후로는 이건 평생을 살아도 내가 뜯어고칠 수 없는 수정 불가침한 DNA의 영역임을 깨달았다.


DNA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마트에서 유부초밥을 살 때도 유부가 몇 조각 들어있는지 그램수와 판매가격을 머릿속 주판으로 셈하며 비교하는 시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나의 남편은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절약 DNA라는 게 있다면 이 남자는 아마 자린고비 유전자의 진화형 쯤 될것이다. 마켓컬리가 가끔씩 스윽 넣어주는 쿠폰이 칠천 원짜리인지 오천원짜리 인지에 따라 그날의 쇼핑 여부가 결정 나기도 하니까.




그런 그의 손에 김 상자도 들려왔겠다, 마침 아이들이 산타 노래도 부르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려는 심산이었을까.  절전모드였던 그가 재부팅을 하더니 아까 그 김 상자를 소중히 들어 안고 다가온다.


"자,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뭐, 오다 주웠다. 이런 건가. 당당하게 건네면서도 염치는 없는지 안면 전체가 씰룩씰룩거린다. 문제는 이 김 세트를 대하는 나의 기분이다. '이봐요 세대주님. 받아온 선물을 토스하다니, 동방예의지국에서는 그러는 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싶다가도 '그래, 김이면 어떠냐, 빈손보단 낫다.'싶어 헛웃음이 나온다.


"우와, 엄마 이거 뭐예요? 아빠가 무슨 선물 주신 거예요?" 선물이라며 큰 상자를 건네는 모습을 본 아이들도 눈빛을 반짝이며 가세해왔다. 대답 대신 상자 위에 직관적으로 적힌 빨간 글자를 가리켰다.

대. 천. 김.

김 상자 위로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오월과 유월이가 바닥을 구르며 배를 부여잡고 웃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애증의 대천김


기념일이란 기념일은 늘 이렇게 남편만의 방식으로 찾아온다.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황당했지만 이제는 짠내 나는 그의 상황대처와 순발력에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웃음은 사랑과 함께 오는
최고의 선물이다.
-찰리채플린



가족들과 함께 웃을 있는 시간이야말로  어떤것보다 크고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닐까.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의 진짜 의미를 가득 채워준 대천김. 이 김을 먹어요, 말아요?







사진출처: by Ylanite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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