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분명 우리집 세대주가몸 담고 있는부서에서 연말 선물로 들려 보낸 것이 틀림없다. 결혼 12년 차쯤되어보니,예상 답안을 눈 감고 때려맞춰도 타율이 꽤 괜찮다.
1. 피곤에 찌든 그가
2. 퇴근길에 친히
3. 김 한 상자만 사서귀가했을리가만무하니까.
김 상자를 부엌에 털썩 내려놓고, 그는 스위치 꺼진 로봇처럼 소파에 누웠다. 산타의 존재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 하는 두 형제의 소리를 가만히 듣더니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나 보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아이들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로그아웃 된 건 아니었군.
그러고 보니 각종 기념일을 해당일, 바로 그 당일에 챙겨본 기억이 전무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꿈틀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온다.신혼 초에 맞이한 시어머니 생신날, "식사는 미리 했으니 이만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겠다"는시아버지의 모습을목도한 후로는 이건 평생을 살아도 내가 뜯어고칠 수 없는 수정 불가침한 DNA의 영역임을 깨달았다.
DNA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마트에서 유부초밥을 살 때도 유부가 몇 조각들어있는지 그램수와 판매가격을 머릿속주판으로 셈하며비교하는 시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나의 남편은 돈을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절약 DNA라는 게 있다면 이 남자는 아마 자린고비 유전자의 진화형 쯤 될것이다. 마켓컬리가 가끔씩 스윽 넣어주는 쿠폰이 칠천 원짜리인지 오천원짜리 인지에 따라 그날의 쇼핑 여부가 결정 나기도 하니까.
그런 그의 손에 김 상자도 들려왔겠다, 마침 아이들이 산타 노래도 부르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내려는 심산이었을까.초절전모드였던 그가 재부팅을 하더니 아까 그 김 상자를 소중히 들어 안고 다가온다.
"자,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뭐, 오다 주웠다. 이런 건가. 당당하게 건네면서도 염치는 없는지 안면 전체가 씰룩씰룩거린다.문제는 이 김 세트를 대하는 나의 기분이다. '이봐요 세대주님. 받아온 선물을 토스하다니, 동방예의지국에서는 그러는 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싶다가도 '그래, 김이면 어떠냐, 빈손보단 낫다.'싶어 헛웃음이 삐져 나온다.
"우와, 엄마 이거 뭐예요? 아빠가 무슨선물 주신 거예요?" 선물이라며 큰 상자를 건네는 모습을 본 아이들도 눈빛을 반짝이며 가세해왔다. 대답 대신 상자 위에 직관적으로 적힌 빨간 글자를 가리켰다.
대. 천. 김.
김 상자 위로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오월과 유월이가 바닥을 구르며 배를 부여잡고 웃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애증의 대천김
기념일이란 기념일은 늘 이렇게 남편만의 방식으로 찾아온다.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황당했지만이제는 짠내 나는 그의 상황대처와 순발력에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웃음은 사랑과 함께 오는 최고의 선물이다. -찰리채플린
가족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그어떤것보다 크고 값진크리스마스선물이 아닐까.그나저나 크리스마스의 진짜 의미를 가득 채워준 대천김. 이 김을 먹어요,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