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광진구 여름이었다.
가끔 어른과 청소년 간의 토론을 하는 시간이었다. 주제를 가지고 각 세대가 생각하는 이야기와 살아온 삶을 전달하며 어느 때처럼 토론은 뜨거웠다. 청년세대로서 이야기를 듣다가 한 명의 친구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뭔가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보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꾸며내는 말을 하는 듯했다. 내가 쉽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토론이 끝나고 대화를 요청했다.
조심스레 그날의 이야기를 물어보자 A는 당황했다.
대안학교에서 윗 세대들과 많이 지냈던 A는 생존의 도구로 자신을 하루빨리 형, 누나들과 같이 되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친구에게도 무기가 필요했다. 내가 어리다고 무시받지 않을 무기 말이다. 젊을 땐 누구나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다. 특히나 청소년기는 많은 변화를 겪어 내는 불안정하고 힘든 시기 아닌가?
하지만 사회에선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잠재력보단 현재의 능력을 더 요구하는 것 같다. 또래보다 인정받고 우위에 설 수 있는 능력. 그래서 A는 언어를 선택했다. 내가 조금 더 다양한 언어와 어려운 단어를 구사하면 약한 부분이 감춰지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에 너무나 공감이 되었고 어느 한 편 동의도 되었다.
그래도 대화 말미엔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언제까지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살 수만은 없다고. 포커스가 내가 아닌 남에게 맞춰져서 살아간다면 언젠가 소재는 고갈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때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아픈 걸 아는데 병원엔 갈 수 없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 삼촌이 찾아왔다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형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생존 방식)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사회구조가 점점 복잡해져 살아가는 기준에 대한 요구사항도 많아지고 ‘나’로 살아가기에는 벅찬 시대 아닌가?
‘현재의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게 된다. ‘옆집 얘는 수학학원 다니잖아 넌 이거라도 해야지’를 듣다 보면 내면의 소리는 듣지 못한 채 외부의 기준에만 맞춰 살아가게 된다.
자신한테 당당해야 남한테 당당할 수 있고 스스로한테 솔직해야 남한테 솔직할 수 있다고. 진짜 멋진 대화는 ‘자신의 이야기’할 때 나오지 않을까? 부족해도 나니까, 그것을 인정하면서 강해지는 것이 '나' 아닐까?
잃어가던 나를 다시 되찾는 것이 WAI라고 생각한다.
온종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고민하고 있진 않은지
그것이 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있진 않은지
나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A가 고급스러운 어휘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왜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는가? 가 포인트다. A는 대화를 하면서 공감하며 말을 이어갔다. 무시받기 싫었다고. 그렇게라도 말하면 잠깐은 나를 인정해 주는 느낌이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를 함께 생각해 볼까?
바로 ‘인정’이다.
스스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인정'이라 말할 수 있다.
나의 부족하고 약한 모습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쉬운 예로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자연스레 말할 시점이 되었다는 건
스스로 어느 정도 인정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마지막 결말의 대사는 이러하다.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비밀의 삶”
그 비밀의 삶 속에 숨겨진 나만의 약함과 부족함이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 말이다.
그것마저 오픈하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겐 오픈할 필요가 있다.
처음엔 어렵겠지만 서시히 인정하는 연습이 나비게이션의 출발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