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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10. 2023

죄송합니다. 똥 얘기 좀 하겠습니다.

“좀 앞으로 움질 일 수 있겠어?”

남편의 엉덩이와 변기커버 사이로 보이는 물속은 온통 핏빛이었다.

“나 아무래도 치핵이 튀어나온 것 같아.”

‘치핵이 뭐지?’

일단 라텍스 장갑을 낀 후, 물티슈로 닦아내기 위해 갖다 댔다.

평평해야 할 곳에 탱탱볼 만한 무언가가 만져졌고, 물티슈 가득 붉은 피가 묻어났다.

남편을 일으켜 세워 워커에 기대게 했다.

변기 주변은 분무기로 분사한 것처럼 피가 흩뿌려져 있었고, 남편의 바지 역시 같은 상태였다.

‘뭐부터 해야 하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신 차리자!’

병실로 달려가 새 바지를 가져왔다.

남편의 옷을 갈아입히고, 바닥에 뿌려진 피를 물티슈로 한참 닦아냈다.


남편을 겨우 침대에 눕히고 간호스테이션으로 달려갔다.

“… 저 남편이 변을 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치핵이 튀어나온 것 같아요… 너무 고통스러워해요.”

항문에서 튀어나온 붉은 살덩어리가 감염이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20살 남짓한 어린 간호사는 한 손 가득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남편의 엉덩이에 갖다 댔다.

남편은 갑작스러운 고통에 신음했다.

때마침 당직 중이던 혈액종양내과 주치의 최 선생님이 달려왔다.

꼼꼼히 남편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치핵이 튀어나온 것 같은데… 음… 상태가 안 좋네요. 일단 항문외과 협진 의뢰를 하겠습니다.”

“선생님, 언제쯤 항문외과 선생님이 오실까요?”

“글쎄요, 항문외과도 워낙 하루종일 수술이라 메일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이틀 후 새벽 5시 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하루는 너무 끔찍했다. 

남편은 침대를 세워 기대려고 하면 상처가 눌리는 고통에 몸을 세울 수도 없었고, 허리가 아파 옆으로 누울 수도 없었다. 

이 병동에서 아무도 남편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항문외과 선생님을 기다리며 미어캣처럼 병실 입구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밖은 해가 뜨기 전이라 온통 회색 빛이다.

남편의 얼굴도 석고로 만든 사람처럼 핏기 없는 무채색으로 변해있었다.


‘오늘이 토요일인데, 항문외과 선생님이 오늘도 안 오시면 월요일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복도에서 시작된 슬리퍼 소리가 점점 우리가 있는 병실 안까지 다가왔다.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누군가가 남편 침대 앞에 멈추는 듯싶더니,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흰 의사 가운에 ‘외과’라고 적혀있다. 우린 살았다!

상처부위를 침착하게 살펴보더니,

“보통 이 정도 상태면 긴급수술을 하는데, 곧 항암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먹는 약과 연고를 처방해 줄 테니 경과를 좀 보지요.”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치핵이 현재는 많이 부어서 튀어나와있는 상태인데, 이렇게 연고를 발라 치핵 주위로 돌려가며 조금씩 넣어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 마술봉이라도 달린 듯 튀어나온 살 덩어리가 스르륵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부어서 완전히 들어갈 수 없는 상태지만, 약 먹고 꾸준히 연고를 발라주면 부기가 빠질 거예요.”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여정이 시작된 ‘반지의 제왕’ 프로도처럼, 항문외과 선생님의 눈빛 지명으로 치핵의 치자도 들어보지 못한 내가 항문 관리인으로 임명되는 순간이었다.


“까똑!”

관리부 서부장님이다.

“대표님과 점심 먹고 마곡에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도착하면 2시 반쯤 될 것 같아. 시간 괜찮아?”

“다행히 커피마실 시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저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오시게 해서 어쩌죠.”

“난 집이랑 더 가까워지고, 퇴근시간 짧아져서 좋은걸.”


남편이 강동구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자 대표님은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하셨다.

“대표님, 대표님은 회사 근처 사시잖아요. 여긴 대표님 댁과 반대편 끝에 있어요. 남편 몸이 조금 나아지면 제가 회사로 갈게요.”

“설부장이 잘 있는지 걱정돼서 그러지. 서 부장이랑 같이 남편 좀 안정되면 미리 연락하고 갈게.”

대표님은 명절기간을 제외하고 평일 오후 2시부터 다른 회사 대표님들과 비즈니스 미팅을 잡았었다.

이 시간이 대표님께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표님과 서부장님이 지하 1층 커피숍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은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커피숍 테이블에 서서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대표님과 서부장님이 서있다.

브라운색 블레이저에 비슷한 계열의 톤다운된 팬츠를 입은 대표님과, 긴청치마에 진한 브라운색 카디건을 입은 서 부장님이 서 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나 사이에 안 보이는 선이 그어진 것 같았다.

“대표님! 서 부장님! 여기 너무 멀죠? 이따 어떻게 돌아가세요?”

“지하철 타고 왔어. 지하철 타면 금방 가.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이네.”

“평소에 2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여기서 3끼를 다 챙겨 먹었더니 오히려 살찐 것 같아요.”

나는 더 밝게 웃고,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는 커졌다.

대표님과 대화하는 10분 남짓 혼자 둔 남편이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계속 시간을 체크했다.

“얼굴 봤으니 됐어. 남편 기다리겠다. 얼른 올라가 봐. 회사 걱정은 하지 말고, 둘만 생각해.”

서부장님에게 받은 쇼핑백엔 동료들이 챙겨 준 비타민과 남편의 쾌차를 비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처음 남편의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우리를 걱정했으며,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회사로 이직한 것은 13년 전 일이다. 

패기 넘치고, 자존심만 셌던 30살.

입사초기, 지금은 이사님이시고, 그땐 팀장님이었던 분과 의견차이가 좀 있었다.

나는 그만 흥분해서 소리치며 말했다.

“팀장님, 그런데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 그분은 나보다 15살 많은 분이다.

그렇게 사회화가 덜 된 미숙했던 나는 서부장님을 통해 성실함과 희생정신을 배웠고, 대표님을 곁에서 보며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최근에 동료가 된 영업부 박부장에게는 리더십이 무엇인지, 정과장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는 법에 대해 배워가는 중이었다. 지금의 회사는 나를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시켜 줬으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동료들이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안심이 되었다.

회사는 성인이 된 이후의 나를 키워 준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었다.

항상 주위사람들에게 얘기했다. 나는 다른 운은 모르겠지만, 회사복은 있다고.

나는 1600미리 아이보리색 책상에 같은 색 아이보리색 파티션이 둘러 쳐진 2평 남짓한 나의 공간을 좋아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9층 통창 앞에 서서 고층 건물에서 반사되는 눈부신 빛을 구경하는 것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면 예전처럼 나의 일상인 설부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떡진 머리에, 땀에 찌든 상태로 외출복과 잠옷의 구분 없이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설이에게 아빠를 돌려줘야 한다.

지금은 그것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 

잊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 반복한다.


다음날이 밝았다.

드디어 첫 번째 항암을 시작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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