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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25. 2023

얼마나 힘드셨어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유칼립투스와 삼나무 향이 내 곁으로 다가와 감쌌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좋아하는 향기를 들이마셔 폐 안에 가득 가뒀다.

취향이 허락되지 않는 감옥에서 갓 출소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온 것이다.


지난겨울 언니집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에는 교보문고 매장에서 날 법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아파트는 오피스 건물도 아니고, 디퓨저를 복도에 설치했나. 향기 고르는 센스 대단한데. 책의 도시라서 그런가?’

현관문이 열리고 중문 앞에 서자 향기는 몇 배로 강해졌다.

향기의 출처는 언니네 집이었다.

“홍, 이 디퓨저 어디 거야? 교보문고 향이 나.”

“아, 진짜? 향 괜찮아?”

“응. 역시 홍은 센스쟁이야, 이런 향을 어떻게 찾았어? 너무 좋다.”

“좋기는 머리만 아프구먼.”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오빠가 한마디 거든다.

나는 주방으로 가 손을 씻고, 싱크대에 올려진 양파의 껍질을 까며,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홍은 나와 설이의 외투를 정리하고 어느새 주방으로 들어와 오빠가 어질러 놓은 주방을 정리하며,

“우리 엄마가 지난주에 가져온 LA갈비랑, 아버님표 쭈삼불고기, 어머님표 동태찌개, 모둠회 있어. 상호씨는?”

“이번 주말도 출장.”

“아이고, 고생이 많네. 그럼 평일에 쉬는 거야?”

“그럴 리가. 월화수목금금금월이지.”

“어머, 힘들어서 어떻게 해. 둘이 처음 만났을 때도 아르바이트하고 있지 않았어? 정말 평생 쉬는 날이 없네. 어쩌냐.”

상호씨가 19살, 내가 20살 때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까워졌다.

첫 데이트로 영화를 보기로 한 날, 내가 약속시간에 늦는 바람에 상영관 문이 닫히기 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영화 제목도 잊히지 않는다. 미이라 2.

지금은 사라진 왕궁예식장 건물 지하 영화관으로 들어가자 스크린을 중심으로 좌석이 3 구역 있었고, 드나드는 계단까지 사람들로 꽉꽉 차 있었다.

그땐 관람객 수의 제한이 없던 시절이라 인기 있는 영화의 상영관은 출근길 지하철처럼 콩나물시루가 되곤 했었다.

구석자리 계단에 겨우 두 사람이 앉을 공간이 있어 일단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숨 돌리는데,

“어? 너 여기서 뭐 하냐?”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데이트 간다 던 친오빠가 앉아있었다.

“뭐야? 오빠가 왜 여기 있어?”

“저 놈은 누군데?”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20살과 23살의 대화는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어머, 여동생? 안녕? 나 오빠 여자친구야. 오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홍, 상호씨, 친오빠, 나는 23년 전 이렇게 처음 만났다.


며칠 후 퇴근길 집 앞에 택배상자가 놓여있었다.

열어보니 디퓨저 세트였다.

언니는 내 말을 허투루 듣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중문 앞에 서자, 유리벽 안으로 4년 동안 매일 보던 거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빠르게 짐을 거실 한편에 모아둔 후 뒤 돌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현관문에서 계단 다섯 칸, 다시 높은 계단 두 칸.

129 사설구급차 뒷 문이 열리고, 남편이 누워있던 침대가 의자 형태로 접혔다.

“일어날 준비 됐어?”

“응.”

앉아있는 남편의 몸을 고정하고 있던 안전벨트가 풀리고, 구급요원이 남편의 교정기 구멍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남편을 일으켰다.

일어난 남편이 막 태어난 아기 펭귄처럼 앞뒤로 뒤뚱거리다 중심을 잡았다.

뒤에서 구급요원이 남편의 등을 받치고, 양팔에 나와 다른 한 명의 구급요원이 붙었다.

20cm 높이의 계단 앞에서 어른 네 명이 심호흡을 했다.

남편이 다리를 들어 무게 중심을 옮기는 타이밍에 맞춰 등을 받치고 있던 구급요원이 남편에게 힘을 보탰다.

그렇게 두 계단을 오르고, 나머지 10cm 정도 높이의 계단 5개는 계단 난간을 잡고 마저 올랐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급하게 거실에 마련한 모션배드에 남편을 눕히면서 우리의 이동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집에 오니까 좋지?”

“……좋지.”

“왜?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내일 외래 진료 갈 생각을 하니까 걱정돼서.”

“물론 계단을 내려가고, 밴을 타고 가는 건 어려울 거야. 너무 힘들면 응급실로 바로 들어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자. 오늘 계단 올라 보니까 어때? 내일도 129 불러서 병원 갈까?”

“생각보다 계단 오르는 건 괜찮았어. 내일 우리끼리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러면 예약한 밴을 타고 가자. 당신 허리 때문에 낮은 승용차는 힘들다고 했으니까.”

다음날 아침, 흰 죽을 먹고 충분히 소화를 시킨 다음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편을 따라 들어갔다.

외래진료를 보기 전 샤워를 하기 위해서다.

몸에 알코올이 아니라 물을 묻히는 것은 45일 만의 일이었다.

45일 전까지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했다. 워낙 땀을 많이 흘리는 타입이기도 했고, 몸이 조금이라도 끈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항상 좋은 향기가 나는 남편을 난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45일 만에 남편은 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씻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혼자 서 있기도 힘든 상태에 혹시나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뼈가 부러질 것이 분명했다.


“상호 씨, 괜찮아. 보행보조기도 여기 있잖아. 이것만 꼭 잡고 있으면 괜찮을 거야.”

혼자 서 있거나 걷기 힘든 노인을 위한 보행 보조기로, ㄷ자 모양으로 생긴 파이프가 골반 높이까지 오는 형태다. 서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친 것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남편이 보행기 안으로 들어가 보행기를 잡고 서 있자 나는 나보다 20센티는 큰 남편의 머리 위로 물을 뿌렸다. 샴푸를 덜어 남편의 머리카락에 골고루 묻힌 후 손 끝으로 비벼 거품을 냈다.

번쩍 든 내 팔을 타고 거품이 내려가 입고 있던 옷을 적셨다.

남편의 몸을 씻기고 나자 남편이 씻은 것인지 내가 씻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둘 다 홀딱 젖어버렸다.

부랴부랴 남편의 몸을 말리고, 나 역시 씻고 나오니 기운이 쫙 빠졌다.

남편을 먼저 외출복으로 갈아입히고 나서 오랜만에 옷장을 열어 어제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버핏 블루셔츠에 밝은 색의 일자핏 청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서니 오랜만에 검은색이 아닌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외래 시간은 3시 15분으로 1시에 벤을 예약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남편이 혹시나 힘이 풀려 계단을 구르지 않도록 나는 남편 앞에 버티며 계단을 내려갔다.

무사히 밴에 탑승하자 이미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버렸다.

축구복을 입은 기사님이 지나가는 동호회 사람과 대화 몇 마디를 나눈 후 우리는 출발할 수 있었다.


“아니, 젊은 사람이 많이 다쳤나 보네. 어쩌다 이렇게 많이 다쳤어요?”

기사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남편이 입을 열었다.

“위암이 척추로 전이돼서 긴급하게 허리수술을 받았어요. 암세포가 척추 신경을 눌렀거든요.”

그 후 기사님은 도착하는 15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땐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에 빗물이 스며들어 거리엔 비릿한 흙냄새로 가득하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첫 외래 준비가 너무 빨리 끝났다.

원무과에 접수하고, CD를 복사하는 과정 하나하나 대기시간이 길거라고 예상하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는데, 반대로 모든 일이 공백 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앞으로 1시간 반 동안 뭘 하지?’

남편의 얼굴을 보니 이미 지쳐 눈 밑이 꺼져 있었다.

허리가 아파 앉을 수도 없는 남편은 목발을 짚고 지하 1층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상호씨, 잠깐 휠체어에 앉았다가 허리 아프면 다시 일어나자.”

5분 정도 앉아 있던 남편은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채로 다시 일어나 걷기를 반복했다.

1시간 반이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다.

암센터에 외래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 대기실 의자에 가득 찼다. 앉을자리가 부족해 서 있는 사람들도 20명은 되는 것 같다.


“상호씨 이 지역에 암환자가 이렇게 많았네.”

“그러게.”

암센터 안을 바라보며 상호씨가 대답했다.

LED 대기 화면에 상호씨 이름이 올라갔다.

바닥에 있던 이름이 점점 위로 올라가고 앞에 대기인원이 1명이 되자 진료실 앞으로 갔다.


“설상호 환자분.”

경쾌한 하이톤의 담당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고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우리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앉아있던 최선생님이 의자에서 일어나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셨다.

눈을 마주치고 오랫동안 아무 말없이 우리 둘을 바라보다 나온 교수님의 첫마디는,

“얼마나 힘드셨어요.”였다.

예상치 못한 말에 상옥씨도 나도 눈빛이 흔들리고,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 달 반 동안 정말 너무 많은 일을 겪으셨네요. 권교수님 통해서 대략적인 얘기를 듣긴 했는데, 워낙 봐야 할 서류가 많아서 아직 다 검토해보지 못했어요. 최대한 빨리 읽어볼게요. 저희가 최선을 다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젊으신데 건강 회복 하셔야지요. 내일 입원해서 환자분 지금 상태 보는 걸로 해요. 그게 좋겠죠?”

“네, 선생님. 상옥씨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빨리 입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다시 경쾌한 목소리의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1층 입원수속 하시고, 내일 12시쯤 입원문자 갈 거예요. 문자 받으신 후 입원 준비하셔서 내원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코로나 검사 지금 받아두시면 입원 전에 결과 나올 거예요. 받고 가세요.”

“저, 통합간호병동 말고, 간병인 상주할 수 있는 병실이 있나요? 아직 남편이 혼자 지내긴 회복이 덜 되어서요.”

“아, 그럼 일반병동으로 요청해 놓을게요.”


남편과 1층 원무과에서 수납을 하고, 건물 밖 컨테이너 박스에 마련된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마치자 남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휠체어에 남편을 앉히고,

“상호씨 지금 몸 상태가 어때?”

“솔직히 나 밴을 타고 갈 자신이 없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검색창에 지역명과 129를 입력하고, 상위 순서대로 전화를 걸어 당장 올 수 있는 곳으로 예약을 했다.

10분 후 정문 앞에 사설구급차가 멈추고 응급요원이 로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이동식 침대가 남편 앞에 멈추고 부축을 받아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제야 상호씨 얼굴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빗속을 달려 겨우 집에 도착했다.

회색빛 날씨가 상호씨를 따라와 얼굴에 안개처럼 깔렸다.

흰 죽도 몇 술 뜨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잠이 든 상호씨는 자정부터 일어나 다시 잠들지 못하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새벽 4시 나는 남편이 있는 거실로 나갔다.

“상호 씨, 잠이 안 와? 어디 아파?”

“너무 어지럽고 온몸에 힘이 없어.”

혈압계와 산소포화도를 측정했지만, 특별히 문제는 없었다.

“점심시간쯤 입원 문자 온다고 하니까 조금만 버텨보자.”

하지만, 오후 1시가 지나도록 입원 문자가 오지 않았다.

병원 대표번호를 거쳐 겨우 입원 담당자와 통화가 됐다.

“오늘 입원 예약했던 설상호 환자인데요, 입원문자를 아직도 받지 못했어요.”

“입원실이 꽉 차서 오늘은 입원이 불가능합니다. 죄송하지만, 내일 다시 기다려 보세요.”

“그렇다면 내일은 확실한가요?”

“글쎄요, 그건 내일 돼 봐야 압니다.”

뒤를 돌아보니 침대에 앉은 남편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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