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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JI Jun 27. 2024

내면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이글라우로 간 악어 외>

<노스애르사애> 또래집단을 벗어나서 두려움에 작아진 나에게

열일곱. 나는 학업을 중단했다. 또래의 대한민국에 사는 (지능이 뛰어나거나 다른 어떤 특별한 재능이 일찍 발현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아이들은 학생이다. 대학 혹은 더 먼 미래를 향한 원대한 비전이 있어서 학교를 그만둔 경우가 아니라 더 비참했다. 나는 잘 모르는 일진 무리에게 한 번의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후 친하게 지내던 아이에게 청소시간, 무자비하게 폭력을 당했다. 모두가 내 인간다움이 박살 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며칠 방에 틀어 박혀 지내는 동안 나를 때렸던 아이들이 사이버 폭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로 복통과 (가벼운) 거식증이 생겼다.  


학교 교복만 입으려고 하면 배가 쥐어짜듯이 아팠다.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복 입고 학교를 가라고 이야기하던 엄마도 몇 번 권유 후 더는 말하지 않으셨다. 출석일수의 한계도 있고 한정 없이 학교를 나가지 않을 순 없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첫 번째 집단 폭행 때에도 내가 피해자인데, 가해자인 일진이랑 같이 교내봉사를 시켰던 '우리 학교'아닌가. 두 번째 폭행도 내가 피해자여도 쌍방폭행인 걸로 몰아가겠지. 학교에 대한, 담임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학교에는 나를 지켜줄 제도나 어른 같은 건 없다.


제법 긴 설득도 필요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빠는 왜 학교를 그만두는지 묻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된다. 아빠는 가정에 도통 관심이 없고 밖으로만 나도는 사람이었다. 그 무심함이 나를 살렸다.


엄마는 늘 나에게 과잉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자퇴하는 곳에 따라가 주진 못했다. 이모가 보호자를 대신해서 함께 학교에 가주었다. 담임이 환대했다. 걱정했다고 말했다. 잘 지냈냐고. 


학생들 사이에 그의 별명은 북극곰이었다. 남자치고 하얀 피부에 하얀 셔츠만 주로 입고 다녔는데 덩치를 반영한 별명이었다. 때때로 그의 수업시간 중 질문에 답을 못 하면 아이들의 뺨을 교탁에 서서 때리곤 했는데, 체구가 유독 작고 마른 아이들의 경우 그가 친 뺨의 반대 방향의 벽으로 날아가 부딪히기도 했다. 그런 담임의 환대라니 기괴해서 역했다.


나는 교무실 바깥에 서 있었다.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이모만 나왔다. 처리가 끝났다 했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의 병 탓에 교복만 입으면 배가 아파져서 학교를 관뒀다. 마음에 큰 병이 생겨 밥을 씹어 삼킬 수 없어서 학교를 관뒀다. 그 아이들 무리가 계속 폭탄처럼 욕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두려워서 학교를 관뒀다. 방과 후도 아닌, 일과 중에 모두 보는 앞에서 폭력을 휘두르던 친구였던 아이가 무서워서 학교를 관뒀다.


처음 며칠은 학교를 관둔 시원함만이 남았다. '이제 거기서 벗어났다.' 나에겐 지옥 같던 시간들에서 일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학교를 그만뒀어도 내 병들이 씻은 듯 낫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아프고 두려웠다. '우리 집을 알고 찾아오면 어쩌지?' 또 욕이 잔뜩 섞인 메시지를 보낼까 봐 메신저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요즘으로 치면 인스타 DM으로 욕 폭탄을 맞아서 계정 비공개나 폭파, 인스타 어플을 아예 삭제하는 것 정도로 보면 될 거 같다.)


또래 집단을 벗어난 상태로 평이함을 유지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글라우로 간 악어>는 "그런 정신머리로 야생에서 어떻게 살아남을래?" 싶은 작은 악어가 나온다. 머리에 꽃을 단 것 같은 해맑음으로 중무장한 그에게 "동물의 왕이 될 수 있겠어?" 아빠가 다그친다.



작은 악어는 평생 살아온 자연을 등지고 이글라우로 간다. 작은 악어는 자신이 속했던 집단에서 벗어난다. 

두려움은 없었을까?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한 악어답기를 거부한 작은 악어의 이야기이다.



애벌레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 아닐까? 흔히 우리 삶의 지지부진한 성장과정을 애벌레와 나비에 비유한다. '네가 지금 잘 안되고, 힘들고 성공하지 못한 건 아직 애벌레라서 그래. 그렇지만 이 애벌레 과정을 잘 참고 지나면 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훨훨 날 수 있단다.' 


<노스애르사애>에는 왜 모두 같은 꿈을 꾸는 거지? 의문을 가진 (철학가) 애벌레가 등장한다. 또래 집단을 벗어나도 괜찮다. 또 모두 성공한 삶을 살지 않아도 '나'로 충분하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어떤 모습이든 어디에 있든 행복할 수 있다고.

노스애르사애는 무슨 뜻일까?



이글라우로 간 악어 / 아노쉬 글, 그림 / 전희경 번역 _ 노스애르사애 / 이범재 글, 그림

또래집단을 벗어난다는 건 당사자 역시 분명 큰 용기가 필요하다. 당사자의 부모 역시 자녀가 또래집단에서 (자의든, 타의든) 이탈한다면 악어의 아빠처럼 '어디 갈 테면 가봐라!' 작은 악어를 한심하게 여긴 것처럼 굴거나 걱정스러울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용기를 내어서 또래 집단을 탈출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러 독특함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집단에서 잘 살아남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또래 사회에서의 살아남는 스킬을 획득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분명 있다. (물론 그 스킬은 건너뛰어도 좋을 아이들도 더러 있다.)  


내가 심어져 있는 땅이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떠나도 괜찮다. (이때의 적합함과 부적합함의 판단은 그저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누가보아도 나에게 맞지 않은 땅이어야 후회가 적을 것이다.) 어느 땅에서든 또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떠나지 않고 머물 자유도 존재한다. 남들이 모두 무언가 그럴싸한 것이 되어가도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도 괜찮다.


'내'가 가장 원하는 형태로의 '나'

'나'다운 '나'로 현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어딨 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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