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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붓과 끌, 서로 다른 언어로 말 하다.

파올로 베로네세 & 안토니오 카노바



프란체스코 키아라티니의 ( Francesco Chiarattini, 1748-1796)의 1786년작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업실( View of Antonio Canova's Studio)>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 Antonio Canova, 1757-1822)의 창작 세계와 당시 조각 스튜디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중요한 드로잉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로마에 위치했던 카노바의 작업실 내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과 예술적 환경, 그리고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이 드로잉은 카노바의 창작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시각 자료료 활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우디네의 시립 박물관( Civici Musei, Udine)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카노바(1757-1822)가 교황 클레멘스 14세(재위: 1769-1774)의 기념비를 제작하던 시기의 작업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작업 과정과 스튜디오의 활기찬 분위기를 세밀하게 담아냈고요. 드로잉은 카노바의 작업실이 단순한 개인 공간을 넘어 예술 창작의 중심지이자 문화 교류의 장소였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View of Antonio Canova's Studio by Francesco Chiarattini,1786, Civici Musei, Udine/RegioneFVG








키아라티니(1748-1796)의 드로잉은 카노바 (1757-1822) 작업실의 복합적인 공간 구성과 다양한 인물, 작품, 도구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풍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림은 넓고 높은 작업실 공간을 보여줍니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창문과 인공조명이 어우러져 작업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업실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대규모 작업이 진행되고 다른 쪽에는 작은 모형들이 진열되어 있어 여러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03년에 카노바가 로마의 캄포 마르초 지구에 정착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차분하게 발전시킬 공간으로 이 스튜디오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스튜디오는 고고학적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외부 벽에 고대 조각상 등의 유물들을 배치하여 예술과 고대 연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드로잉 속에는 카노바 자신과 여러 명의 조수들, 그리고 방문객들이 등장하여 작업실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작품 속에서 누가 실제 카노바인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의 작업 방식과 작품을 통해 드러날 뿐이죠. 그는 점토 스케치( bozzetti)와 정교한 모델( modelli)을 직접 제작했습니다. 최종 대리석 조각에 마지막 손길을 더해 생생한 표면 질감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고요.





작업실에는 조각을 거칠게 다듬는 수습공들과 석고 모형에서 대리석으로 형태를 옮기는 전문가들이 여럿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림 전면에는 두 명의 조수가 로프 드릴을 사용하여 대리석을 다듬고 있습니다. 이는 카노바(1757-1822)의 작업이 여러 단계의 분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GrandTour Collection






작업실 중앙에는 두 명의 방문객이 이 활기찬 작업 과정을 관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카노바의 스튜디오는 당시 유럽의 그랜드 투어( Grand Tour)중 방문해야 할 명소 중 하나였습니다. 그랜드 투어(Grand Tour)는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진 여행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여행의 주요 목적은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여행은 단순한 여가나 휴식보다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지식을 쌓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림에는 다양한 제작 단계의 조각상과 모형들이 배치되어 카노바의 체계적인 작업 흐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작업실 오른쪽에는 교황 클레멘스 14세 기념비의 실물 크기 석고 모형과 대리석 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석고 모형에는 폰토그래프( pointing system)를 사용하여 대리석으로 치수를 옮기는 데 사용되었던 검은 점들( pointing marks)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폰토그래프는 석고 모형의 정확한 치수를 대리석 블록으로 옮기는 데 사용되는 중요한 기구로, 카노바가 기술적 정밀성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줍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그의 작업실이 단순히 예술적 영감의 공간을 넘어 정교한 공학적 기술이 동원되는 곳이었음을 강조합니다.




Gypsotheca_Canova_Metodo_di_lavoro.jpg Museo Canova





배경 왼쪽 선반에는 작은 머리상과 흉상 모델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는 카노바가 초기에 아이디어를 탐색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테라코타(terracotta) 스케치( bozzetti)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스케치들은 작가의 손가락과 도구 자국이 남아 있어 그의 빠른 창작력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왼쪽 방에는 카노바(1757-1822)의 초기 성공작인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Daedalus and lcarus>(1779)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Theseus and the Minotaur>(1783)가 보입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베네치아 대사와 오스트리아 후원자에게 헌정되었던 것으로, 당시 카노바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Penitent Magdalen, 1791, Musei civici, Bassano del Grappa






키아라티니(1748-1796)의 드로잉은 카노바의 작업 방식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층적으로 시각화합니다. 카노바(1757-1822)는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후, 이를 점토로 작은 스케치(bozzetti)를 만들었습니다. 이 스케치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3차원적으로 탐구하고 구체화하는 초기 단계였습니다.





이후 그는 더욱 정교하고 상세한 점토 모델( modelli)을 제작하여 후원자들에게 제시하고 디자인을 다듬었습니다. 이 모델들은 때때로 테라코타로 구워져 영구적으로 보존되거나, 석고로 캐스팅되어 그의 작품 보관소인 지프소테카( Gypsotheca)에 소장되었습니다. 이곳은 그의 석고 조각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을 의미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iHmL5MQ-g







최종적으로 실물 크기의 점토 모델은 석고로 캐스팅되어 대리석 작업을 위한 원본이 되었습니다. 조수들은 '포인팅 시스템(pointing system)을 이용해 이 석고 모델의 치수를 대리석 블록에 옮겼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카노바의 면밀한 감독 하에 이루어졌고요. 그는 대리석 표면의 최종 마무리 작업을 직접 수행하여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Antonio-Canova.-Penitent-Magdalen-c.-1794%E2%80%931796-marble-and-gilded-bronze_5283-008_-2-RET-WHITE.jpg Penitent Magdalen by Antonio Canova,1791/ Patrons





카노바(1757-1822)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고요함, 완벽한 균형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극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절제된 우아함과 고전적인 형태를 특징으로 합니다. 특히 대리석의 표면을 마치 실제 피부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게 다루는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생생함과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카노바의 스튜디오는 단순한 생산공간이 아니라, 예술적 교류와 교육, 그리고 당대 미술계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작업실은 후원자들과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어 예술 창작 과정을 직접 목격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카노바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스튜디오는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처럼 기능하며, 다양한 단계의 작품들을 통해 예술적 아이디어가 어떻게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4iOwTbDX24





오늘은 베네치아 출신으로 '색채의 마법사'로 불리는 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 1528-1588)와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 1757-1822)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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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오롤 베로네세( Paolo Veronese, 본명 파올로 칼리아리. 1528-1588)는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화려한 색채, 웅장한 구도, 그리고 극적인 인물 표현으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화가이고요. 그는 티치아노( Titian,1488-90~1576)와 틴토레토( Tintoretto, 1518-1594)와 더불어 후기 르네상스 베네치아 회화를 주도한 '위대한 삼인조'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베로나에서 태어나 고향 이름을 따 '베로네세'라 불리게 된 그는 예술적 자유와 세속적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아내며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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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베로네세는 1528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석공 가브리엘레 칼리아리( Gabriele Caliari)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공 일을 도왔으나, 14세에 화가 안토니오 바딜레( Antonio Badile)의 제자로 들어가 회화에 입문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독특하고 화려한 채색법이 엿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딜레의 딸 엘레나( Elena)와 결혼하고요. 그는 바딜레에게서 그림의 기본기와 함께 인간과 건축물을 융합시키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습니다. 또한, 라파엘( Raphael)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 Giulio Romano)에게서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베로네세의 우아함을 추구하는 성향과 잘 맞았습니다.






1553년경 베로나를 떠나 베네치아에 정착한 베로네세는 , 티치아노의 작품을 익히고 그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공간 구성을 가진 화려한 양식을 확립했습니다. 1550년대 후반에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Andrea Palladio, 1508-1580)와 협력하여 빌라 바르바로( Villa Barbaro)와 같은 저택의 프레스코화를 장식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장식화에도 매료되어 로마를 방문하여 영감을 얻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고전적 건축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사교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대규모 장식적인 프레스코와 유화 작업을 맡아, 베네치아 전역의 궁전과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습니다. 베네치아는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한 부유한 도시국가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미술 후원으로 이어져 '베네치아파'라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형성했습니다.




베네치아파는 빛과 색채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으며, 피렌체 르네상스의 조형적 형태주의와 대비되는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특색으로 삼았습니다. 습한 기후 때문에 프레스코화 제작이 어려웠던 베네치아 화가들은 염료에 기름을 섞어 그린 유화 물감을 최초로 사용하며 풍부한 색채감을 구현했습니다. 베로네세는 이러한 베네치아 미술의 흐름 속에서 활동하며,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 회화 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베로네세는' 최고의 컬러리스트'로 알려질 만큼 색채의 응용을 즐겼던 위대한 색채 화가였습니다. 그는 밝고 풍부한 색상을 사용하여 낙천적인 화풍을 구사했습니다. 채색된 무늬와 아른거리는 빛의 향연 속에서 차가운 은회색을 따뜻한 노란색 옆에 배치하는 등 최대의 효과를 내는 실험을 통해 풍부한 색조를 만들어냈고요. 그의 색채는 티치아노의 영향아래 자연주의 회화 스타일을 발전시킨 결과로 평가됩니다. 작품 속 비단, 금속, 피부의 섬세한 질감은 그의 뛰어난 묘사 능력을 입증하며, 붉은색, 녹색, 금색, 파란색과 흰색은 화려한 생명력과 깊이감을 강조합니다.






베로네세(1528-1588)는 빈틈없는 구도와 함께 장대한 건축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웅장한 작품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는 고대 건축물들을 로마의 웅장함을 상기시켜 주는 환상적인 채색 공간으로 확장하기 위해 환영적인 장치들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그의 천장화에서는 '소토 인 수( sotto in su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다.)'기법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극단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관람자들이 밑에서 그림을 올려다볼 때 형상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이 회화에 현실감을 더하고, 건축적 공간을 시각적으로 확장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입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파란 하늘과 고전적인 형태의 난간들을 배경으로 한 연극 무대와 같은 환경에서 화려한 수단과 벨벳의상을 걸친 채 자세를 취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인물을 등장시켜 압도적인 그림을 그렸고요. 실제 유럽 왕들과 귀족들을 모델로 삼기도 했습니다. 인물들의 근육, 곡선, 날개 등은 욕망의 물질성을 포착하며, 감정적 공명을 관람자에게 전달합니다.





안토니오 카노바( Antonio Canova, 1757-1822)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양식을 대표하는 조각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이상적인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뛰어난 기술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당대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노바는 대리석을 주 재료로 사용하여 신화적 주제, 인물 초상, 묘지 기념물 등을 제작하며 고전적 우아함과 조화를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그는 1757년 이탈리아 북부 포사뇨( Possagno)에서 석공인 페에트로 카노바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그는 석공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며 어릴 때부터 돌과 진흙으로 조각하는 것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의 솜씨를 기뻐하며 "저 아이는 언젠가 훌륭한 조각가가 될 거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카노바는 백작의 저택 만찬에서 깨진 조각상을 대신하여 버터로 사자상을 조각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백작의 후원을 받아 정식으로 예술 교육을 받게 됩니다.





1770년, 카노바는 베네치아의 조각가 주세페 베르나르디의 작업장에서 수습생으로 일하며 고대 조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775년 독립하여 베네치아에 작업실을 거쳐, 1776년 19세에 조각 작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제작했습니다. 1779년 22세에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제작하며 초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요. 특히 <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당시 로코코 양식을 띠었지만, 너무 사실적이어서 살아있는 모델에 석고를 부어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1780년 그는 로마에 정착하면서 고대 로마의 유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신고전주의 예술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로마는 당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유적발굴과 빙켈만(Winckelmann)과 레싱( Lessing)의 고전주의 이론에 힘입어 신고전주의 운동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카노바는 고대 조각을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모방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카노바의 활동 시기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의 신고전주의는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감성적이고 화려한 표현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습니다. 이 사조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상적인 미와 조화를 본받고자 했고요.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혁명, 산업 혁명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했습니다.




신고전주의의 이론적 토대는 독일의 미술사가 요한 요아힘 빙켈만( 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이 제시한 "고귀한 단순미와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미학적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예술이 인체를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표현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성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술가들이 이러한 이상적인 신체를 만들기 위해 고대 그리스 미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강조했고요. 카노바는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열심히 연구하고 모방하며 이러한 빙켈만의 이론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적용했습니다. 당시 고대 미술의 모방은 창조적인 행위로 이해되었으며, 예술성이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PCzZa5hWQ&t=1s





카노바의 조각은 고대의 이상적 인체 비례와 해부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구도와 절제된 감정 표현이 특징입니다. 그는 인체의 형태와 근육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이상적인 미를 구현했으며, 인물들은 거의 신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고귀한 인상을 줍니다 . 이러한 작품들은 극적인 감정보다는 차분하고 고요한 감정을 드러내며, 세부 표현보다는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에 중점을 둡니다. 또한, 작품의 표면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고전적 우아함을 나타냅니다.



카노바는 교황 클레멘스 14세 기념비(1787)와 교황 클레멘스 13세 위령비(1787-1792)등을 제작하며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802년부터 1806년까지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갔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소재로 한 나체 조각 작품과 그의 여동생 폴린 보르게세의 조각상 등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요.




프랑스 , 러시아, 폴란드 등 다양한 나라의 유명 인사와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존 캠벨 대령은<큐피드의 키스로 환생한 프시케>를 의뢰했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유수포프 왕자도 그의 작품을 주문했습니다. 카노바는 정치적 후원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탈리아의 문화적,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The Family of Darius Before Alexander, 1565-1570/wikipedia






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 1528-1588)의 < 알렉산더 앞의 다리우스 가족 The Family of Darius Before Alexander> (1565-1570) 작품입니다. 유화 작품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전투에서 패배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는 고대 일화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대의 풍요로운 정신과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detail/wikipedia






작품은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다리우스는 전투에서 도망쳤지만, 그의 아내 스테이테라 1세, 어머니 시시감비스, 그리고 두 딸 스테이테라 2세와 드라페티스는 알렉산더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알렉산더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의 가족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적을 정복하는 것보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더 왕다운 일이다.
-플루타르코스-






작품의 핵심은 시시감비스의 오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시감비스는 알렉산더가 친구 헤파이스티온과 함께 천막에 들어섰을 때, 키가 더 큰 헤파이스티온을 알렉산더로 착각하고 그에게 자비를 구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 알렉산더는 관대하게 헤파이스티온 또한 알렉산더와 같다고 말하며 시시감비스의 당황스러움을 누그러뜨렸고, 이는 그의 친구에 대한 칭찬이 되었습니다.







작품은 전면에 주요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 뒤로 시종, 창병, 난쟁이, 개, 원숭이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배치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가장 뒤편에는 아치형 화랑과 많은 구경꾼들이 보이는 건축물이 배경을 이룹니다. 이러한 구도는 베로네세 특유의 "연극적 디자인"을 보여줍니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건축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요. 시시감비스의 제스처는 중앙 분수의 수직선과 일치하며 강조되었고요.







베로네세는 이야기의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서술적 해석에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고대 그리스나 근동이 아닌 베로네세가 살았던 16세기 베네치아의 화려한 궁전 홀에서 펼쳐집니다. 등장인물들의 의상도 베네치아 시대의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 화가들의 관습에 따라, 베로네세는 당대의 인물들을 그림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사물들의 단단함, 재질, 무기와 갑옷, 동물 등 극적인 장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묘사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배경의 아치형 복도에서 쏟아지는 강한 역광을 받는 원숭이와 같은 요소는 베로네세의 독특한 테마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가 자연스러운 형상 안에 의미심장한 소재를 즐겨 삽입했음을 보여주고요. 그는 배경의 깊이와 전경의 대비를 강조했으며, 그림자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표현하는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였습니다. (비교해 보세요. 같은 주제 다른 작가의 작품입니다.)







The. Family of Darius Before Alexander by Charles Le Brun/wikimedia commons





https://www.youtube.com/watch?v=YnYknwUqaCM









The Wedding at Cana,1563/wikipedia






어수선한 잔칫집입니다. 작가님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계신가요?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의 <가나의 혼인 잔치 The Wedding at Cana >(1563)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종교적 서사와 세속적 화려함이 절묘하게 조화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이 대형 유화는 베로네세의 예술적 역량과 당시 베네치아 사회의 풍요로운 문화적 특성을 총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예술적 특징은 장대한 건축 공간을 배경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을 한 많은 인물을 배치하는 일종의 풍속화와 같은 경향을 보였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The Marriage at Cana 또는 The Wedding at Cana)는 유화기법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34세의 베로네세가 15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가로 약 990cm(32.5피트) 세로 약 666cm(22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입니다.






1562년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에 의해 의뢰되었습니다. 수도원 식당 (refectory)의 후벽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지요. 수도원은 작품의 주제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지정하면서 그림을 크기, 등장인물, 색채까지도 구체적으로 지정했다고 전해집니다. 식당을 위한 그림 주제로는 대규모 만찬 장면을 묘사하는 <최후의 만찬> 또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성체성사와 성변화를 상징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의뢰 계약서에 베로네세에게 324 두캇과 숙소, 그리고 포도주 한 통을 제공하는 조건과 함께 울트라마린과 같은 최고급 안료를 사용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은 요한복음 2장 1-11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즉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을 다룹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예수,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이 가나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았는데 ,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물통에 물을 채운 후 손님들에게 가져다주라고 명했습니다. 하인들이 시킨 대로 하자 물이 포도주로 변했고, 잔치의 책임자는 이전 포도주보다 훨씬 질 좋은 포도주에 감탄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고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detail/Dreamstime.com







베로네세의 작품은 이 기적의 순간을 묘사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적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신성한 순간을 놓치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구약의 율법이 신약의 사랑으로 변한 것의 상징이며 ,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림 속에는 성체성사의 의미가 여러 상징을 통해 담겨 있습니다. 예수 머리 위로 하인들이 고기를 자르는 모습은 예수의 수난과 희생을 암시합니다. 음악가들 사이에 놓인 모래시계는 물질적 쾌락의 덧없음과 예수의 희생이 임박했음을 상징하고요. 마리아의 검은 베일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미리 암시합니다.








작품은 웅장한 고대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합니다. 안드레아 팔라디오( Andrea Palladio)의 건축 이념이 반영된 베네치아 궁전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화가는 이 작품에서 13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을 궁정풍 저택에 치밀하게 배치했습니다. 마치 무대 연출가가 된 듯한 인상을 주고요. 이러한 구성은 수도사 식당 내부 공간을 그림 속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의도했습니다. 예수와 마리아는 식탁 중앙에 위치하지만 , 신랑과 신부는 화면 왼쪽 구석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종교적 인물을 작품의 중심에 두면서도 베네치아의 세속적 축제 분위기를 강조하는 베로네세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지상과 천상의 영역을 연결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 이러한 구도적 분할은 바로코 회화의 특징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베로네세는 색채의 대가답게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여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특히 푸른색을 위해 당시 가장 값비싼 안료인 울트라마린(청금석)을 다량 사용하여 , 그림의 풍부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했습니다. 황금새, 붉은색, 푸른색이 작품 전반에 걸쳐 지배적으로 사용되어 풍요롭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빛의 사용은 강한 대비보다는 전체적으로 밝고 환한 느낌을 줍니다. 자연스러운 채광 효과를 중시하는 팔라디오 건축의 이념이 회화에 투영되었고요.





detail/wikipedia



작품 전경 중앙에 배치된 4인조 악단이 보이시나요. 베로네세 자신(흰 옷, 비올라), 티치아노(붉은 옷, 콘트라베이스), 틴토레토(파란 옷, 바이올린), 야코포 바사노(자줏빛 옷, 오보에) 등 당대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들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예술가들이 회화뿐만 아니라 음악으로도 현세를 찬양했다는 당시 베네치아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detail/Metal Posters





신랑과 신부는 작품 왼쪽 아래에 위치하며, 화려한 잔치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듯 그려져 있습니다. 신부는 포도주 부족으로 인해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신랑은 새로 제공된 포도주 맛에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초대 손님들을 볼까요? 당시 유럽의 주요 정치적 인물들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등장합니다. 이들의 등장은 베네치아의 국제적인 위상과 부,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과의 교류를 상징합니다. 이쑤시개를 사용하는 모습도 보이네요.







Paolo_Veronese_-_The_Marriage_at_Cana_%28detail%29_-_WGA24858.jpg detail/wikipedia







물을 포도주로 옮겨 붓는 하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하인들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하인들이 그림의 활기찬 분위기를 더하고요. 특히 흑인 노예가 포도주를 권하는 모습 등은 당시 베네치아의 번성했던 무역과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detail /wikimedia commons




<가나의 혼인 잔치>는 단순한 종교화를 넘어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회 문화적 특성을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번성한 항구 도시로서 세계 각지에서 상인과 여행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개방성과 풍요로움이 그림에 반영되어 있고요. 화려한 복장의 하객들, 동양인, 터번을 쓴 인물들, 자수 식탁보등은 베네치아의 사치스러움과 국제적인 교류를 보여줍니다.



베네치아는 다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비해 종교적으로도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종교재판소의 성직자 판사가 정부에서 파견된 판사의 동의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 베네치아의 세속적 권력이 종교에 우의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를 중앙에 배치하고도 화려한 세속적 잔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베로네세의 예술적 자유가 가능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235년간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179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어 파리로 옮겨졌습니다. 거대한 크기 때문에 운반상의 편의를 위해 작품은 무자비하게 반으로 절단되었고, 이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파리로 옮겨진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시 이어 붙여지고 대대적인 복원 과정을 거친 후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 패배 후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프랑스 측은 작품의 운송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샤를 르 브룅의 <시몬의 집에서의 성찬>을 베네치아에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도 작품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습니다. 1870년 보불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중에는 약탈을 피하기 위해 대형 트럭에 실려 이동하며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1989년부터 3년간 루브르 박물관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2006년에는 고화질 컴퓨터 복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복제품은 2007년에 작품의 원래 위치인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 식당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원작은 루브르에 남았지만, 그 이미지만이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낸 의미 있는 조치였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그 웅장한 규모, 복잡한 구성, 생생한 색채로 동시대 및 후대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20세기 현대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장엄한 스케일과 예술성으로 "가나의 두 번째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1793/wikipedia





Clay










안토니오 카노바( Antonio Canova, 1757-1822)의 <큐피드의 키스로 환생한 프시케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1787-1793) 작품입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대리석 조각으로, 큐피드가 죽음과 같은 잠에 빠진 프시케를 키스로 깨우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1787년에 영국의 군인 존캠벨 대령의 의뢰로 처음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155cm* 168입니다. 사랑을 상징하며,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조각은 그리스 신화에서 큐피드가 프시케를 죽음 같은 잠에서 키스로 깨우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프시케는 미의 여신 비너스의 아들 큐피드의 아내로, 시어머니의 저주 때문에 남편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는데 보았다가 죽음의 잠에 빠지게 됩니다. 큐피드가 그녀를 키스로 깨우는 장면은 사랑이 역경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NA0272.jpg The Golden Ass,Apuleius/Naxos Records







이 이야기는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의 라틴 소설 "황금 당나귀( The Golden Ass)"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술의 인기 있는 주제였습니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Lucius Apuleius)의 라틴 소설 <황금 당나귀 The Golden Ass>는 고대 로마 시대에 쓰인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라틴어 장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모험, 미스터리, 유머, 그리고 마법의 요소를 결합한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호기심 많고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 귀족 루키우스( Lucius)의 이야기를 다루지요. 루키우스는 마법과 주술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마녀 팜필레( Pamphile)의 변신 마법을 훔쳐보려다가 실수로 당나귀로 변화게 됩니다. 당나귀가 된 그는 여러 주인에게 팔려 다니며 갖가지 고난과 모욕을 겪습니다.





그의 모험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당나귀가 되기 전과 당나귀로서의 고난과 모험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소설의 중심부에 삽입된 '큐피드와 프시케 Cupid and Psyche)'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공주 프시케가 사랑의 신 큐피드의 사랑을 받지만, 비너스 여신의 질투와 자매들 간의 간계로 인해 여러 시련을 겪는다는 내용입니다.





detail/wikipedia






큐피드는 잠든 프시케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우고, 프시케는 깨어나며 팔을 뻗어 큐피드를 감싸 안으려는 모습입니다. 프시케 옆에 놓인 단지와 큐피드의 화살통은 아풀레이우스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세부 요소입니다.








카노바는 이 작품에서 대리석을 거의 천상의 재료처럼 보이게 만드는 놀라운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조각의 매끄럽게 연마된 표면은 인물들의 피부가 내부의 빛으로 빛나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프시케와 큐피드의 부드러운 곡선은 큐피드의 날개와 옷자락의 섬세한 디테일과 아름다운 대비를 이루고요. 특히, 큐피드의 날개와 프시케 주위를 흐르는 옷자락은 대리석이 거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 조각은 받침대 위에서 회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관람객이 작품 주위를 돌며 여러 시점에서 인물들의 역동성과 감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800px-Amor-Psyche-Canova-JBU04.JPG Amor(Cupid)kisses Psyche by Antonio Canova, Louvre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800년에 요아힘 뮈라( Joachim Murat)가 첫 번째 버전을 소장했으며, 그의 사후 1824년에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러시아 귀족 유수포프( Yusupov) 공작이 1796년 카노바로부터 두 번째 버전을 구입했으며, 이 작품은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소장되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두 번째 버전의 실물 크기 모형이 있습니다. 카노바의 이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로맨틱 시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Tripadvisor



Cupid and Psyche by Antonio Canova/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Sketching in clay/Patrons






Antonio Canova, The Three Graces, original full-scale plaster model dated 1813/Pinterest






안토니오 카노바(1757-1822)의 <삼미신 The Three Graces>(1814-1817) 작품입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대리석 조각으로, 제우스의 세 딸인 에우프로시네(환희), 아글라이아(우아함), 탈리아(아름다움)를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여러 버전이 존재하여 각각 다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The_Three_Graces_in_the_Hermitage_by_Antonio_Canova.jpg The Three Graces by Antonio Canova, Hermitage , Russia/Wikimedia Commons









카노바(1757-1822)는 1814년에 존 러셀 베드포드 공작 6세( John Russell, 6th Duke of Bedford)의 의뢰를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베드포드 공작은 1814년 카노바의 로마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황후 조세핀을 위해 제작된 삼미신 조각에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의 버전을 의뢰했습니다.




두 가지 주요 버전이 존재하며, 각 버전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버전으로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첫 부인이었던 조세핀 드 보아르네( Josephine de Beauharnais)를 위해 제작되었으나, 조세핀이 1814년에 사망하면서 그녀의 아들 외젠( Eugene)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버전은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Hermitage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The Three Graces by Antonio Canova, 1814-17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두 번째 버전으로 베드포드 공작을 위해 제작된 작품입니다. 1819년에 워번 애비( Woburn Abbey)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버전은 현재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과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 Scottish National Gallery)이 공동 소유하고 있으며, 번갈아 가며 전시됩니다. 워번 애비 버전은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되었으며, 둥근기둥이 있고 중간 인물(아글라이아)의 허리가 약간 더 넓습니다.






V&A Museum,London



Victoria and Albert Museum,London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두 버전 모두 카노바의 변화하는 스타일과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는 인물들의 부드러운 살결을 강조하기 위해 대리석을 세심하게 조각했습니다. 이 조각은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에서 조각되었으며, 인물들의 머리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모여 있는 모습은 "에로틱한"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인물들은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으며,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앙 인물이 등을 돌리고 바깥 인물이 관객을 향하는 구도와는 다릅니다.




세 명의 날씬한 여성 인물은 서로 손을 잡고 스카프로 연결되어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작품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통일성"을 나타냅니다. 조세핀 황후를 위한 버전에서는 삼미신이 세 개의 꽃 화환과 섬세한 유대감을 상징하는 화환으로 장식된 제단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바로크 양식의 풍부한 아름다움에 도전하며, 관객에게 고정된 관점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하도록 유도합니다. 카노바는 관객이 조각 주변을 돌거나 받침대의 회전 손잡이를 이용해 모든 각도를 감상하도록 의도했습니다. 이렇나 움직임은 인물들의 섬세한 상호작용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며, 실루엣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The Three Graces/ArtRKL







https://www.youtube.com/watch?v=IxVEcynUgrQ











The Feast in the House of Levi, 1573/alamy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가 1573년에 완성한 <레위 집에서의 향연 The Feast in the House of Levi> 작품입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거대한 캔버스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베네치아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종교화를 넘어선 예술적 자유와 종교적 권위 사이의 긴장 관계, 그리고 당대 베네치아 사회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Gallerie dell'Accademia)에 소장되어 있고요. 그 웅장한 규모로 인해 특별히 확장된 전시실인 1층 Hall X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유화 작품으로, 그 크기는 높이 555cm, 너비 1280cm (18피트 3인치* 42피트)에 달합니다. 이는 16세기 제작된 캔버스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 거대한 크기는 베로네세가 많은 인물을 포함하고 상세한 장면을 묘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그림은 1573년 도미니크 수도회의 산티 조반니 에 파울로( Santi Giovanni e Paolo) 교회 식당의 후면 벽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되었습니다. 원래 목적은 1571년 화재로 소실된 티치아노의 '최후의 만찬 Last Supper'을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뢰는 베로네세의 마지막 대규모'만찬' 연작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는 후원자가 작품의 세부 묘사에 대해 거의 지시를 하지 않았고, 작품 구성은 전적으로 예술가에게 맡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관례는 베로네세가 이 작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유롭게 해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베로네세는 <가나의 혼인 잔치 The Marriage at Cana>와 같은 이전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성경 속 장면을 화려하고 웅장한 연회로 재해석하여 거대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림은 고전적인 스타일의 거대한 기둥과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포르티코(회랑)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아치들은 삼폭 제단화( triptych)를 연상시킵니다. 개선문과도 유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요.





The Feast in the House of Levi,1573/Arte Magazine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회는 좌우의 계단을 통해 시선이 예수에게로 자연스럽게 유도됩니다. 베로네세는 선형 원근법 대신 여러 지점에서 수렴하는 대각선을 사용하여, 대규모 화면과 다양한 관람 각도를 고려한 복합적인 공간감을 조성했습니다.





베로네세는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상, 특히 원색의 옷차림을 통해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배경의 고전 건축물과 대비되어 시각적 활기를 더합니다. 그림 전체에 퍼지는 빛은 인물과 공간을 따뜻하고 생생하게 만들며,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주변에는 빛의 광휘가 묘사되어 신성함을 강조합니다.






detail/Smarthistory





작품은 예수와 열두 사도 외에도 수많은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여기에는 어릿광대, 술 취한 독일 병사, 난쟁이, 코피를 흘리는 하인, 앵무새를 든 사람, 다양한 인종의 노예, 그리고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은 당시 16세기 베네치아 사회의 화려하고 다문화적인 면모를 반영하며, 작품에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분위기를 부여합니다.





detail,1573/Flickr






detail, 1573/Flickr






<레위 집에서의 향연>은 원래 <최후의 마찬>으로 구상되었으나, 베로네세가 그림에 삽입한 여러 세속적이고 부적절한 요소들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1573년 7월 18일, 베로네세는 베네치아 이단 심문소( Holy Tribunal of Venice)에 소환되어 약 2시간에 걸쳐 심문을 받았습니다. 재판관들은 그림에 "어릿광대, 술 취한 독일인. 난쟁이 등 불경스러운 인물들"과 과장된 의상 및 배경이 포함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특히 독일 병사들의 등장은 당시 독일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루터파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로 오해될 수 있어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베로네세는 그림이 거대한 캔버스였기 때문에 "남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인물들을 추가했다고 변론했습니다. 그는 예술가에게는 시인이나 광인과 같은 "예술적 자유(poetic license"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인물들이 예수와 사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배치되어 신성함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체 인물들이 등장한 것을 예시로 들며 자신을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반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의 일환으로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 Council of Trent)의 예술 관련 지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의회는 종교 예술이 명확하고 경건해야 하며, 불필요한 장식이나 선정적인 요소로 인해 신성한 메시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재판관들은 베로네세에게 3개월 내에 그림을 수정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특히 개를 지우고 막달라 마리아를 그려 넣으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로네세는 그림 자체를 수정하는 대신, 단순히 제목을 <레위 집에서의 향연 The Feast in the House of Levi>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새로운 제목은 루카복음 5장 29-32절에 나오는 세리 레위(훗날 사도 마태)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푸는 장면을 의미합니다.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존재가 교리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이 제목 변경으로 더 이상의 논쟁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detail/hypercritic







베로네세는 전통적인 종교적 서사를 당대의 세속적 연회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화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주제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림에 담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최초의 순수 화가 중 한 명으로 불립니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숙한 <최후의 만찬>과는 대조적으로, 종교적 메시지를 현실 세계의 맥락 속에 배치하여 더욱 인간적이고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레위 집에서의 향연>은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된 후 현재까지 꾸준히 보존 및 관리되고 있습니다. 179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명령으로 파리로 옮겨졌다가 10년 후 인 1815년 베네치아로 반환되어 현재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안치되었습니다. 작품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미술관에서는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확장된 전시실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 작품이 단순한 예술품을 넘어선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현재는 미술관 1층의 Hall X에 전시되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The Borghese Gallery/Rome Tickets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17세기부터 보르게세 가문이 수집한 로마 조각, 고전 거장들의 회화, 근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지요. 특히 카라바조,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르니니 등의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예술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로마의 가장 중요한 미술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바티칸 미술관 다음으로 많은 소장품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의 역사는 17세기 초, 교황 바오로 5세( Pope Paul V)의 조카이자 개인 비서였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Cardinal Scipione Borghese)이 방대한 예술 컬렉션을 소장할 목적으로 빌라를 건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추기경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바탕으로 예술품 수집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613년경부터 빌라 건축이 시작되어 1617년에 완공되었고요. 이는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플라미니오 폰치오(Flaminio Ponzio,1560-1613) 가 설계하고 조반니 바산치오(Giovanni Vasanzio, 1550-1621, 네덜란드 건축가)가 완성했습니다. 빌라는 로마 시 외곡의 핀치오 언덕(Pincian Hill)에 위치한 교외 저택(villa suburbana)으로 지어졌습니다. 예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자 사교의 장으로 활용되었지요.



View of the Villa Borghese/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보르세 가문은 16세기 시에나에서 로마로 이주하여 부와 명성을 얻은 유력 가문입니다. 추기경의 수집 활동은 가문의 재력과 영향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빌라 보르게세는 4세기 동안 보르게세 가문의 소유로 남아있었습니다. 19세기말 가문의 재정난으로 인해 1902년에 이탈리아 정부에 매각되었습니다. 1903년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공립 미술관으로 재탄생했고요. 미술관으로 개관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을 거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 건물인 빌라 보르게세 핀치아나(Villa Borghese Pinciana)는 17세기 초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건축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빌라는 대칭적인 구조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홀들이 르네상스적 이상과 바로크적 화려함의 조화를 반영합니다. 건물은 예술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으며, 2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층에는 여러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요. 특히 잔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작품들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detail/getyour Guide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가문이 가진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적극 활용하여 방대한 컬렉션을 구축했습니다. 그의 수집 방식은 때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1607년 , 교황은 화가 카바리에르 다르피노(Cavalier D'Arpino)의 작업실에서 107점의 그림을 몰수하여 추기경에게 넘겼는데, 여기에는 카라바조의 초기작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1608년 페루자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서 교황의 칙령( motu proprio)으로 강제로 옮겨졌습니다.





추기경은 고대 로마 유물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807년, 나폴레오 보나파르트의 매형이었던 카밀로 보르게세는 재정난과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344점의 고대 유물( 조각 154점, 흉상 160점, 부조 170점 등)을 프랑스 정부에 매각했으며, 이 작품들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T-08urKawo






Paolina Borghese as Venus Victrix by Antonio Canova/ Britannica







안토니오 카노바( 1757-1822)의 < 승리의 비너스 모습을 한 폴리나 보르게세 Paulina Borghese as Venus Victrix>(1805-1808)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조각의 정수로 평가받는 대리석 조각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누이인 폴리나 보나파르트 보르게세(Paulina Bonaparte Borghese)를 승리의 여신 비너스( Venus Victrix)로 이상화하여 묘사한 것으로, 고전주의적 아름다움과 당시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문화적 맥락이 절묘하게 결합된 걸작입니다. 로마에서 제작되었고요.






이 조각상은 폴리나 보나파르트 보르게세의 남편인 카밀로 보르게세( Camillo Borghese) 왕자에 의해 의뢰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했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한 초상화 제작을 넘어, 나폴레옹 가문과 보르게세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정치적, 사회적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폴리나를 승리의 여신 비너스로 묘사함으로써, 아름다움과 승리라는 신화적 상징을 통해 가문의 권위와 명예를 강조하려 했습니다. 개인의 초상을 신화적 형태로 승화시켜 신고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조각상은 반나체 상태의 폴리나 보르게세를 승리의 여신 비너스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반쯤 누워 팔꿈치를 두 개의 쿠션에 기댄 채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약간 위로 향해 자긍심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듯하고요. 이러한 포즈는 단순히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여왕처럼 군림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고대 조각의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폴리나 개인의 매력과 관능성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폴리나는 왼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심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수여된 황금 사과를 상징합니다. 이 사과는 폴리나가 미의 여신 비너스로서의 지위를 획득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신화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핵심 요소이지요. 조각상의 기단 아래에는 회전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관람객이 조각상을 여러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여, 카노바가 의도한 다각적인 아름다움을 온전히 경험하게 합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폴리나는 나폴레옹의 누이였으며, 그녀의 남편 카밀로 보르게세는 보르게세 가문의 대표자로서, 이 작품은 나폴레옹 왕조의 권위와 보르게세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은 종종 통치자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조각상 또한 폴리나의 아름다움과 신화적 영광을 통해 나폴레옹 가문의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예술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antonio-canova-1757-1822-the-greek-hero-theseus-sits-asride-the-dead-D9BDYM.jpg Theseus and the Minotauro, 1781-1783/Alamy







안토니오 카노바의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Theseus and the Minotaur>(1781-1783)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직후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현재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카노바가 베네치아를 떠나 1780년에 로마에 정착한 후 초기 완성작 중 하나입니다. 조각에 사용된 거대한 대리석은 1781년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였던 그의 후원자 지롤라모 줄리안( Girolamo Zulian)이 카노바에게 주었으며, 줄리안은 카노바에게 작품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했습니다.





카노바는 처음에는 테세우스가 미노티우로스와 싸우는 장면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고전주의 화가였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개빈 해밀턴( Gavin Hamilton)의 조언에 따라, 영웅이 패배한 괴물 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더욱 고요한 장면으로 주제를 변경했습니다. 이러한 해밀턴은 폭력적인 장면보다는 정적인 그룹을 만드는 것이 더 큰 호평을 받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러한 해밀턴의 조언은 카노바 작품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DrYUcaQXgAAfmXg.jpg Theseus and the Minotauro, 1781-1783/Syrcast





이 조각상은 영웅 테세우스가 쓰러진 미노타우로스 위에 승리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특징으로 합니다. 테세우스의 근육질 몸매는 이상적인 완벽함으로 인체를 표현하는 카노바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줍니다. 역동적인 구성에서 테세우스는 침착한 자세로 클럽을 들고 있으며, 이는 그가 아래에 쓰러져 있는 야수적인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정복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패배한 미노타우로스는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인간적인 특성과 동물적인 특성이 혼합된 모습을 보여줍니다.신화적 본질과 물리적 형태를 놀라운 정확성으로 포착하는 카노바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미노타우로스의 왼쪽 다리 옆에는 미궁에서 길을 되짚기 위해 테세우스가 사용한 실타래가 보입니다.







Antonio_canova%2C_teseo_e_il_minotauro%2C_1782.JPG Theseus and the Minotauro by Antonio Canova/wikimedia commons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웅장함'
- 빈켈만( Winckelmann)-





그의 베네치아 시대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Daedalus and Icarus>와 비교해 보세요.



Daedalus and Icarus by Antonio Canova, 1779/ wikimedia commons









The Triumph of Venice/ Wikimedia Commons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의 <베네치아의 승리 The Triumph of Venice> 작품입니다.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웅장하고 상징적인 걸작 중 하나입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광과 정치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고요. 이 대형 천장화는 베네치아의 정치적 심장부인 도제 궁전( Doge's Palace) 내 대평의회실(Sala del Maggior Consiglio)의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1585년경에 제작되었습니다. 베로네세는 그의 탁월한 색채 사용, 역동적인 구도, 그리고 정교한 알레고리적 묘사를 통해 베네치아가 신의 축복을 받은 강력한 해상 강국임을 선포합니다. 당대 베네치아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확고히 드러내고요.






그의 후기 대표작 중 하나로, 베네치아 도제 궁전 대평의회실 천장 중앙에 위치합니다. 작품은 거대한 타원형의 유화 캔버스화로, 대평의회실이라는 유럽에서 가장 큰 방 중 하나인 공간의 천장을 압도적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대평의회실은 52m* 25m의 크기로, 베네치아의 모든 25세 이상 귀족 남성 1,200명에서 2,000명이 모여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도제를 선출하던 장소입니다.






이 작품은 1574년과 1577년에 도제 궁전을 휩쓴 두 차례의 대화재 이후 복구 및 재장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1577년 화재는 대평의회실과 스크루티니오실( Sala dello Scrutinio) 등 궁전의 가장 큰 방들을 소실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과거 젠틸레 벨리니(1429-1507), 조반니 벨리니(1430-1516), 티치아노(1488-90~1576), 틴토레토(1518-1594) 등의 작품들이 손실되었습니다. 이러한 재난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은 궁전의 재장식을 통해 자신들의 회복력과 지속적인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으며, 베로네세는 이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승리>는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베네치아의 부와 안정성, 신성한 보호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시각적 선전물로써 기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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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풍부한 알레고리적 요소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품의 핵심은 베네치아를 의인화한 여성 인물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위엄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구름 위에 자리한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자세는 권위와 우아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화려한 의상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와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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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달린 인물로 표현된 명예( Fame)가 베네치아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장면은 베네치아의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승리를 상징합니다. 공화국의 성공이 신성하게 예정된 것임을 암시하고요.



베네치아를 둘러싼 인물들은 정의 ( Justice), 힘 ( Strength), 신중함( Prudence) 등 베네치아 통치의 기반이 되는 시민적 미덕들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이 미덕들은 베네치아의 힘이 단순히 군사력뿐만 아니라 윤리적 통치와 현명한 리더십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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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배경에는 베네치아의 해상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건축 및 해양 요소

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은 베로네세 특유의 세밀함과 생생한 색채로 묘사되었으며, 광채 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승리의 느낌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이러한 천상의 배경은 베네치아의 승리가 단순히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축복을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베네치아가 교황 및 다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대해 거둔 승리를 표현한 것이지요. 베네치아의 공화정 체제가 신성하게 지지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 그림은 공화국의 정치 구조, 특히 도제와 대평의회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시각적 선전물 역할을 했습니다.





작품은 거대한 타원형 구도를 가지며, 베네치아 여신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다층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베로네세는 원근법과 단축법의 대가로, 천장화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관람자의 시점에 맞추어 인물들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환영적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sotto in su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다). 이러한 기술은 관람자가 마치 천상의 사건을 목격하는 듯한 경외심과 몰입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장대한 건축 공간을 배경으로 복잡하지만 질서 있는 인물 배치를 통해 연극적인 무대와 같은 효과를 연출합니다. 이는 관람자의 시각을 통해 확장시키는 놀라운 원근법과 환상적인 색채 구성과 결합되어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줍니다.





blobid1635169136406.jpg Venice Doge's Palace: Paolo Veronese's Ceiling of the Collegio Hall






대평의회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대평의회( Great Council)가 모이던 곳으로, 도제 선출 및 주요 법안 제정 등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결정되던 장소였습니다. 궁전 자체는 도제의 거주지이자 다양한 정부 기관이 입주한 베네치아의 정치적, 행정적 심장부였습니다.





Veronese's Apotheosis of Venice/ The Artistic Adventure of Mankind





대평의회실 천장에 <베네치아의 승리>를 배치함으로써, 베로네세는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결정들이 그림에 묘사된 미덕과 신성한 지침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베네치아의 공화정 체제와 도제의 역할을 신성하게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Venice Doge's Palace/Alamy









https://www.youtube.com/watch?v=L7L_ZXFFYkA




https://www.youtube.com/watch?v=-T4A7mrc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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