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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사랑이 뭐길래?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사랑은 타이밍이다."


공감하는 문장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죠.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스쳤다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르고요. 더 좋은 인연을 만나 서로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때로는 오랜 기다림  끝에 다가오기도 하며, 주문을 외고 마법을 부리는 별똥별 가로지르는 순간처럼 놓치기 쉬운 것도 '사랑' 같습니다.




아직 땡볕 쏟아지는 늦여름 끝자락. '사랑' 타령을 하며 미리 '가을님'을 초대해 봅니다. 



오늘은 영국화가 두 사람을 소환해 보았습니다.  라파엘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에 속했던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작품과 삶을 만나러 갑니다. Go Go~~








그 애가 화관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할 때

심술궂은 은빛 가지가 갑자기 부러져서

오필리아는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빠지고 말았어.



그러자 옷자락이 물 위에 활짝 퍼져

인어처럼 잠시 수면에 피었었다는구나.



그 애는 마치 인어처럼

늘 부르던 찬송가를 부르더라.

마치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깐 

마침내

옷이 물에 스며들어 무거워지는 바람에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그  가엾은 것이 시냇물 진흑 바닥에 

휘말려 들어가 죽고 말았지.


-셰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그림1. Ophelia, 1851-52/wikipedia  그림2. 축복받은 베아트리체  Beata Beatrix, 1870/ wikipedia



영국지도/ Freepik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nh Everett Millais 1829-1896)의 <오필리아 Ophelia>(1851-1852)입니다. 글을 읽고 각자 떠올려 본 '오필리아'의 모습이 비슷하신가요? 많은 화가들이 <햄릿> 작품에 영감을 받아 '오필리아'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만큼 서정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의  '오필리아' 작품도 드물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은 분명  '햄릿'일 텐데 머릿속 기억은 '오필리아'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아마도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일 테지요. 몸을 맡기고 먼 곳을 응시하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우리 감각을 사로잡습니다(그림 1). 수풀, 오필리아 주변의 꽃들, 그리고 물이 함께 오필리아의 고통을 흘려보내는 정교한 자연의 표현이 감탄스럽고요. 





그의 작품은 마치 실제를 보는 듯합니다. 물 위에 누워 휴식을 즐기는 모습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분명 허구의 이야기인데 사실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것은 치밀하게 묘사된 <오필리아 Opheli>' 주변 배경 때문입니다.  기존의 그림들은 배경이 조연에 불과했지요.  나중에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밀레이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잉글랜드 근교와 호그스밀(hogsmill)강가에서 넉 달 동안 머무르며 배경을 그릴 정도로 인물보다 배경 묘사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치밀하게 묘사한 풍경위에 겹쳐진 밀레이의 시적 상상력이 나온 '오필리아 Ophelia' 인 거지요. 





wikipedia





작품을 들여다보면 여러 종의 다양한 식물과 꽃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각각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요. 그림 속 버드나무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강을 묘사한 부분에도 등장합니다. '버림받은 사랑'을 상징하고요.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양귀비도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쐐기풀은 고통, 흰색의 데이지는 순수, 제비꽃은 순결 혹은 젊은 날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오필리아 귓가에 작은 '장미'꽃 보이시나요. '햄릿'을 향한 '오필리아'의 순수한 사랑을 염려했던 친오빠 레어티스가 그녀를 '5월의 장미'라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봄, 여름에는 풍경을 스케치하고 겨울 동안 주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스케치한 풍경에다 전경에 형상들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인물이 들어갈 자리는 비워 놓은 채 말입니다. '오필리아 Ophelia'는 희곡 속의 가상의 인물입니다. 스케치할  실제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에게 인기 있어 던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Siddal,1829-1862)이었습니다. 그녀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대표라고 불리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연인이었죠. 나중에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가련한 오필리아의 운명처럼 그녀 역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불행한 결혼 생활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study for the painting, 1852/wikipedia





밀레이는 실제로 익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느낌을 잡기 위해 밀레이는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Siddal, 1829-1862)을 무려 4개월 동안 물이 받아진 욕조에 누워 포즈를 취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죠. 욕조의 차가운 물을 램프로 데우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지만 문제는 램프의 불이 자주 꺼진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모델인 시달이 폐렴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밀레이를 상대로 병원비와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법정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할 정도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2M7U8eCeHA








<그림 1>&<그림 2>의 주인공은 눈치채셨겠지만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이라는 이름을 가진 같은 모델입니다. 두 그림 속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왼쪽은 동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1829-1896)가 서정적으로 풀어낸 <오필리아>(1851-1852)입니다. 오른쪽은 남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가 아내인 시달이 죽인 지 1년이 지났을 때 그린 < 축복받은 베아트리체 Beata Beatrix>(1863)라는 작품명을 가진 초상화입니다.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아내이자 유명한 모델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리치"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풍성한 빨간 곱슬머리에 짙은 눈꺼풀을 가진, 키가 크고 인상적인 이목구비의 소유자였지요. 본래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노동계급의 딸이었습니다. 로세티와 10여 년의 약혼기간과 2년 여의 짧은 결혼기간이 전부였습니다. 로세티의 작품에서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묘사되 곤 했던 엘리자 벳스 시달. 남편 로세티의 끊임없는 바람기와 아이를 사산하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합니다. 급기야 아편중독에 시달리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오필리아> 작품의 주인공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살았던 19세기 영국사회를 볼까요? 빅토리아 여왕시대로  이미 산업혁명의 성공을 거둔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영국의 무분별하고 탐욕적인 팽창주의와 산업화, 기계화된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회의를 느낀 영국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타락하지 않은 과거, 그중에서도 중세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예술적 이상향과 낙원을 찾고자 했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섰던 이들이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입니다. 앞글자를 따서 약자로 'P.R.F'라고 씁니다. 이름에서처럼 라파엘전파의 형식과 주제에서 문명 이전의 때 묻지 않고 타락하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중세로의 회귀를 갈망합니다. 그러한 동경은 기독교적인 중세주의의 부활로까지 소급되고요. 그들은 중세를 타락 이전의 정신성을 회복시켜 줄 숭고한 성소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19세기에 나타난 복고적인 화파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얘기죠. 1848년 로열아카데미 출신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기존 화풍(르네상스)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라파엘로 와 미켈란젤로 스타일을 무조건 모방할 것이 아니라 , 라파엘로 이전 중세 화가들의 작품을 본보기 삼아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문학적 스토리, 낭만적 서정, 그리고 중세적 신비를 자신들의 그림에 녹여 내려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풍부했던 19세기 영국. 영국 시민들이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던  시대. 앞서가던 영국의 발걸음이 갑자기 100여 년 전 중세로  뒷걸음을 칩니다. 점차 중세는 지적, 정신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갑니다.  당시 영국에서 고전주의에 의해 암흑시대와  원시적인 것으로 비하되었던 중세가 재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중세는 고도의 물질주의 와 기계화에 의해 훼손되고 잃어버린 19세기 영국인들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옆나라 프랑스는 '인상주의 '로 한창 꽃을 피우고 미술사를 이끌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림 2>.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영국의 화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의  교수이자 단테의 시를 흠모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단테에 버금가는 예술적 소양을 갖추길 바라며, 아들의 이름을 '단테'로 지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로세티는 어린 시절부터 단테의 작품에 친숙해졌고, 이는 그의 예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세티는 단테의 시와 작품을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자신을 단테의 분신으로 여길 정도로 깊은 영향을 받았고요. 






또한, 가브리엘의 가족은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형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Willian Michael Rossetti, 1829-1919)는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일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요. 윌리엄은 라파엘 전파의 창림 멤버 중 한 명으로, 예술과 문학에 대한 비평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기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비평과 기록은 로세티의 작품이 더 널리 알려지고 평가받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여동생 크리스티나 로세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도 탁월한 시인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중요한 문학 인물 중 한 사람이고요. 종교적 주제와 여성의 경험을 다룬 시로 유명합니다. 크리스티나의 대표작으로 <고블린 시장과 다른 시들 Goblin Market and Other Poem>(1862)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띱니다. 또한 헌신적인 기독교 신자로, 종교적 주제와 시와 찬송가도 많이 썼습니다. 









그림1.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1849-50/wikipedia 그림2. Ecce Ancilla Domini, 1850/wikipedia





<그림 1>&<그림 2>는 그들의 초기 그림들입니다. 초기에 라파엘 전파의 그림들은 조롱을 받았습니다. 특히 <올리버 트위스트>로 유명한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는 밀레이의 작품인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를 택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림 1>. 실수로 손바닥을 못에 찔린 소년 예수. 피를 흘리고 있네요. 가족들은 걱정스러운 표정들이고요.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보여주는 소년 예수와 달리 엄마 마리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손바닥에 난 상처는 훗날 아들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니까요. 아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마리아는  내색은 못하고 가슴이 덜컥합니다.  잘 그렸지만 처음 발표했을 때 "불경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던 작품입니다. 경건한 성화를 상상했던 대중들이 급당황한 거죠. 





 밀레이는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름 뿌듯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훌륭한 작품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 생각에 공감하겠지.' 


순진한 밀레이의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밀레이의 그림에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성스러운 가족을 무슨 술주정뱅이와 거지처럼 그렸다."

                     - 찰스 디킨스-



밀레이는 화가로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구원투수가 나타납니다.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낸 밀레이와 그의 동료들이야 말로 영국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만든 사람들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미술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말 한마디에 여론은 단숨에 반전됩니다. 


"러스킨 말을 듣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니, 엄청나게 잘 그리긴 했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러스킨이 거들어 준 덕분에 위기도 모면하고 밀레이의 뛰어난 그림실력과 더해져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RPLiTZAry4&t=1s






그림 2. <Ecce Ancilla Domini, 1850>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가 1850년에 제작한 유화로, 현재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n)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경의 '수태고지'를 주제로 하며,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다소곳이 수용하는 다른 성화들과 달리 마리아의 놀랍고 두려운 표정에 먼저 시선이 가는  작품입니다. 





로세티는 이 작품에서 제한된 색상 팔레트를 사용하여 상징성을 강조했습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하며,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의 망토를 표현할 때 주로 쓰던 색입니다.  빨간색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고요. 백합은 순결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례 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전시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로세티는 이후 공공 전시를 꺼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4B-CWYgctY












그림1. Effie Gray/wikipedia그림2. 페르세포네 Proserpine, 1874/wikipedia







살면서 '사랑'이란 이름은 다양한 빛깔로 찾아듭니다.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그리고 에피 그레이(Effie Gray, 1855-1896)의 사랑의 삼각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림 1>. 1848년 영국의 한 교회. 29살의 러스킨과 19살의 그레이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러스킨은 영국에서 이름 높은 지식인이었고 나름 미남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발랄한 성격의 매력적인 여성이었지요. 누가 봐도 흠잡을 때 없는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스킨과 그레이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먼저 둘의 성격부터 정반대였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러스킨. 거침없는 외향적 성격의 그레이.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중매로 결혼한 두 사람은 결혼 한지 6년이나 지났는데도 잠자리를 한 번도 함께 한 적이 없습니다. 러스킨은 애초에 아이를 원치 않고 에피를 소중히 지켜주고 싶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지만, 실은 에피의 벗은 몸이 자기가 상상한 여인의 모습과 달라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실토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추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러스킨에게 육체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1853년 여름.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 밀레이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하게 됩니다. 당시 존 러스킨은 에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 상태였죠.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밀레이를 스코틀랜드 고원으로 초청했던 것이죠. 당시 존 러스킨은 밀레이를 자기 제자처럼 아끼는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밀레이는 그곳에서 러스킨의 아내인 그레이(Gray)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첫눈에 반합니다. 불행한 세월을 살던 아내 그레이의 눈에 밀레이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겠죠. 자꾸  보니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도 잘 생겼고,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성격도 쾌활했거든요. 에피는 밀레이의 배려심 많고 남자다운 모습에 점점 끌리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레이는 결혼 생활 속사정을 밀레이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망설임도 잠시, 친정 부모를 설득하고, 둘은 힘을 합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1854년 그레이와 러스킨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냅니다. 이듬해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와 에피 그레이 (Effie Gray)는 결혼하게 됩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지요. 밀레이는 '은인 뒤통수를 친 불한당'으로 , 아내 그레이는 '남편을 배신한 천벌을 받을 여자'로 말입니다. 러스킨은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뒤에서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따지고 보면 러스킨도 잘못이 있지.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 할 거면  결혼은 왜 했어?"라고요. 







어쨌거나 에피 찰머스 그레이 (Effie Chalmers Gray 1828-97)는 1848년 에피 러스킨이 되었다가 1855년 에피 밀레이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레이와의 금슬은 좋아서 자식을 8명이나 낳았습니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밀레이는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사업적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이를 본 비평가들은 "밀레이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술과 타협하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는 친구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에서 탈퇴하고 그가 비난하던 아카데미즘 화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삽화가가 되어 일러스트레이션 그림들도 다수 그리게 됩니다.  1869년에는 주간 신문인 <그래픽> 지에 화가로 채용되기도 하고요. 이후 밀레이의 그림들은  상업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70년대에는 돈이 잘 벌리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아이들을 그린 그림들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 비누 회사에 그려준 <비눗방울> 이미지가 대박을 터트리기도 하고요.





 1853년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준회원 자격을 얻었고, 1863년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1885년 준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습니다.  이로써 그는 세습되는 직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1896년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회장의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에 사망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 돈과 사랑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 몇 안 되는 행복한 화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편, 아내 그레이를 빼앗긴 러스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적성에 안 맞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일에 집중한 덕분에 러스킨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예술 비평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몇 번 쓰기도 했습니다. 이전처럼 열렬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평이었습니다. 정말로 밀레이를 깊이 원망했다면 그러진 않았겠지요. 세 사람의 어긋난 사랑이 이만하면 제자리를 찾아간 느낌이라 다행인 부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40l1ov8hfA







아득히 먼 빛, 싸늘한 환호를 가져오는,
벽 위의 , 하나의 순간, 그러나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내 먼 궁전의 문
아득히 먼, 황량함에서 피어난 하나의 꽃 
잔인한 과일, 단 한 번 맛본 것만으로 벗어날 수 없는 
아득히 먼, 지하세계의 회색빛으로부터의 하늘
뼛속으로 스며드는 냉기, 아득히 먼, 멀고 먼 밤들, 그러했던 낮들로부터 오게 될 


아득히 멀리, 자아로부터 이토록 멀리 떨어진 듯한 나, 그리고 날개
생각에 잠긴 낯선 길들, 그리고 신호에 귀 기울이는 
그리하여 아직도 파리한 영혼에 기우는 어떤 마음
누구의 소리인가, 내 깊은 곳에서 이끌려오는, 끝없이 탄식하는 이것은 
"그대로 하여 나 비통에 잠기니, 불행한 페르세포네여!"


-<로세티의 페르세포네> 그림 위쪽에 적혀 있는 제인 모리스를 위한 시-





Rossett's eighth &final version of Proserpine,   Birmingham Museum &Art Gallery,1882/wikipedia





<그림 2>. 오른쪽 위의 글귀는 이탈리아어로 쓴 소네트입니다. 제인에 대한 로세티의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림 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k, 1828-1882)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아내인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와 삼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로제티와 제인의 사랑은 친구인 모리스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끝내는 모리스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레드 하우스(Red House)로 들어가 모리스 부부와 로제티가 함께 동거를 하게 되는 묘한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함께 동거하며 제인을 모델로 그린 로제티의 < 페르세포네 Proserpine > 작품입니다. 





그리스 신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Proserpine).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에 반한 하데스가 그녀를 꾀어 지옥으로 데리고 들어 갑니다. 어머니 데메테르는 딸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다 대지를 돌보지 않으니 대지가 황폐해집니다. 어머니에게 보내달라고 하는 페르세포네에게 하데스는 석류를 먹으면 보내 주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에 지옥의 음식을 맛본  페르세포네는 끝내 하데스의 아내가 되어 1년 중에 3개월은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그 후 페르세포네가 지상에 올라와 어머니와 있을 때는 곡식이 무르익고 페르세포네가 지하로 내려가는 3개월은 차가운 겨울이 된다는 하데스의 여인 '페르세포네'입니다. 






<그림 2>. 모델이 된 제인은 왼손에 한입 먹은 석류를 쥐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은 제인의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고요. 아마도 정말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로세티와의 정분을 모리스에게 말하려고 다짐을 하는 걸까요? 그녀의 꼭 다문 입술이 더 비밀스러워 보입니다. 





구불구불한 머릿결과 마치 바닷물이 출렁이듯 물결치는 블라우스는 페르세포네를 더  신비스러운 여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작가님들은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제 눈에 여신의 우아함도 있지만 중성적인 느낌이 참 많이 듭니다.  남편 모리스와 애인인 로세티 사이에서 제인 역시 고민했겠죠. 제인의 무거울 수밖에 없는 시선과 불안한 가슴이 야무진 입으로 모아진 듯한 느낌입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시대로 성실한 부부관계, 모범적인 가정생활이 우선시되는 사회였습니다. 로제티와의 동거는 가장 기본을 헤치는 사회적 비난을 받는 가십거리로 남편이자 동료인 모리스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로세티와 제인, 두 사람의 사랑은 제인이 로세티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가 비난을 받자 친구인 모리스는 로세티에게 제인과의 관계를 청산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리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동거에 들어갑니다. 




제인을 사랑했던 모리스는 불륜을 인정하고 그들을 자신의 영지 켐스코트로 불러들입니다. 두 사람은 한때 공개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제인과의 관계는 로세티가 마약과 술에 중독되면서 끝이 납니다. 이미 로세티는 첫 부인 엘리자벳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을 저 세상으로 보낸 이후 술과 마약에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 죄책감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약의 부작용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살하기 위해 아내 시달과 같은 방법으로 마약을 통째로 들이켰으나, 죽지 못합니다. 말년에 클로랄 중독으로 정신병 증세까지 보이며 외로움과 은둔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됩니다. 


클로랄 하이드레이트(Chloral Hydrate)는 주로 진정제로 사용됩니다. 과다 복용 시 중독, 행동 변화, 간 손상 등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발암성이고, 생식 세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남편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어떤 사람인 지 궁금해집니다. 그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시인, 소설가, 번역가, 건축사상가, 공예가, 디자이너, 정치가로, 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미술공예운동(Art& Crafts Movement)의 창시자로, 산업화에 따른 대량 생산을 비판하고 중세 수공예 방식으로의 복귀를 주장했습니다. 제인은 그의 공예장식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고요.  아내 제인은 상류층 부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편 모리스가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불리는 모리스의 붉은 벽돌집/ 경향신문





남편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Red House"입니다. 이 집은 영국 런던 남동쪽 벡스리히스에 위치한 저택으로 미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의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1859년에 모리스와 건축가 필립 웹이 설계했으며, 붉은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이 집은 모리스의 예술과 삶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지요. 건축과 디자인의 통합을 시도한 초기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 이곳은 모리스와 그의 아내가 살았던 곳으로, 예술가와 문필가들이 모여 교류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jdCOUGrNK8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찬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 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 먼지가 됐을 텐데.

-존 에버렛 밀레이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동료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1. The Five-year-old James in Bubbles/한국경제 그림2. Dante's Dream , 1871/wikipedia





아이가 비눗방울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세월이 지나, 이제 외할아버지가 된 밀레이가 다섯 살 외손자의 모습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비눗방울 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이의 신기하듯 바라보는 맑은 눈이 사랑스럽습니다.  아이의 눈에 둥둥 떠다니는 비눗방울이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밀레이는 이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남깁니다. 








사랑 담뿍 담긴 외할아버지 밀레이의 시선처럼 비누 회사 ' 페어스 Pears'의 광고팀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밀레이는 처음에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래 봬도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에서 순수예술을 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광고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말이죠. 




 대박이 납니다.  인도의 인구를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가실 겁니다. 밀레이가 평생 먹고살 돈을 이 광고 이미지를 통해 벌게 됩니다. 비누 회사 '페어스 Pears'의 광고 포스터 이미지이자 포장지로 쓰이면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거지요. 한편 비평가들에게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광고지는 나오는 족족 사라져 버렸고, 그는 영국에서 가장 부자 화가가 되었습니다. 




비누 광고 속 꼬맹이 외손주의 성장한 모습, Sir William Miboune James, 1881-1973/wikipedia







 단테 알레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작품 <신곡 La Divina Commedia>은 지옥(Inferno, 1300년), 연옥(Purgatorio,1313년), 천국(Paradiso,1320년)을 여행하는 단테의 여정을 다룬 서사시입니다. 망명자 신세로 삶이 힘들었을 텐데 단테는  'Commedia'라는 글쓰기로  자기 구원을 했나 봅니다.  





이 여정에서 단테는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가장 좋아했던 베르길리우스와 그의 젊은 시절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습니다. 중세 기독교의 사후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역사적 ,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고요.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풍자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끊임없이 묻게 되는 자기 구원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대문호 단테 알레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가 35살 절정기에 정적들에 의해 사형선고받고 20여 년의 망명(1300-1321) 생활을 지내며 썼던 책입니다. 정치적으로 당대의 실패자가 되어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이름만큼은 <신곡>이란 작품을 통해 영원히 남았습니다. 자신은 살아서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피렌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이 되어 준 책입니다. 게다가 그의 생각들은 후에 계몽주의로 연결이 되지요. 



  

 

그림 2. <Dante's Dream>은 로세티의 가장 큰 작품 중 하나로, 그의 그림 중 가장 대규모의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당시 애인이자 나중에 부인이 되는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을 베아트리체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원래 리버풀의 사업가 윌리엄 그레이엄(William Graham)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레이엄은 로세티의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 여러 점을 소장하고 있었죠. 이 작품은 때로 < The Death of Beatrice>라고도 불립니다. 이는 작품의 테마가 단테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 Dante's Dream>은 1883년 왕립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처음 전시되었습니다.  당시 로세티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았지요. 그러나 로세티의 복잡하고 상징적인 스타일은 모두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가브리엘 로세티는 많은 상징적 요소를 사용하여 다양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신곡 La Divina Commedia>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죽음을 테마로 하며, 각 요소들이 복합적인 상징과 의미를 가집니다. 그림 오른쪽 배경으로 고딕 양식의 아치와 창문이 보입니다.  이는 중세의 신비로움과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베아트리체의 순수하고 성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고요. 그녀가 단테에게 가지는 영적인 중요성을 상징합니다. 또한,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은 각각의 심리적 상태와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냅니다. 애도하는 자세로 베아트리체를 바라보고 있는 단테.  베아트리체의 비통하면서도 평화로운 표정은 그녀의 죽음과 영적인 순결을 드러냅니다. 





빨간색과 녹색은 각각 열정과 생명, 회복과 영원을 상징합니다.  로세티는 이 색상들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감정적 상태와 이야기의 주제를 강조합니다. 그림 오른편으로 날아들어오는 붉은 새는 보통 예고된 죽음이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상징합니다. 로세티의 그림 중 <축복받은 베아트리체 Beata Beatrix,1870> 작품에서 엘리사벳 시달에게 날아든 붉은 새를 보셨던 것처럼요.   붉은 새는 베아트리체의 죽음과 단테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불가피한 운명과 상실의 아픔 같은 거죠. 그림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는 장미와 꽃잎은 사랑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장미는 전통적으로 열정과 낭만적 사랑을 의미하지만, 꽃잎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죽음과 슬픔을 암시합니다.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볼 때 <Dante's Dream 1871> 작품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의 예술적 이상을 제대로 구현해 준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도 평가받습니다. 당시 예술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41iu_Isfw






그림1. Isabella, 1848-1849/wikipedia 그림2. Bocca Baciata, 1859/wikipedia

그림 1. <Isabekka and her lover, Whose head ultimately ends up in a pot of basil>






<그림 1>. 밀레이가 제작한 완벽한 라파엘전파주의 (Pre-Raphaelite Brotherhood)에 합당한 첫 작품은 <이사벨라 Isbella>(1848-49)입니다. 이 작품은 1849년 로제티의 첫 라파엘전파 작품보다 한 달 늦게 왕립미술원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이어서 관람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화면 속의 형제들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구성원 일곱 명과 비슷합니다. 그가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에 대한 자신의 형제애를 표명이라도 하듯 이사벨라의 의자 가장자리에 'PRB'라는 이니셜을 새겨놓았습니다. 인물들의 얼굴표정에서 모델들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밀레이는 직업모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나 지인을 모델로 삼아  충실한 묘사를 했고, 그래서인지  각 인물의 특징이 잘 드러나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의 시 <이사벨라, 혹은 바질 단지 Isabella: or the Pot of basil>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구성원에게 자신들이 세운 원칙을 실행해 회화로 구성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키츠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를 썼습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다루었습니다. 주인공 이사벨라가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이후 그의 머리를 바질 화분에 묻고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델들의 의상이 라파엘로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키츠의 시에서 이사벨라는 오빠들의 하인이었던 로렌초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사벨라>는 오빠들이 여동생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던 계획이 방해받자 매우 화가 난 모습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불운한 운명의 연인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이사벨라와 로렌초가 운명의 핏빛 오렌지를 나눠먹는 중입니다. 후에 로렌초의 머리를 벤 뒤 숲 속에 묻어버리는 오빠들 가운데 하나가 호두를 거칠 게 까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어 이사벨라의 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평적 화면이 극적 효과를 자아냅니다.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는 생생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매력을 지닌 시로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14세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지요.  로마에서 결핵으로 25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키츠는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고, 죽은 이후에 널리 인정받습니다.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

1313년 이탈리아 체르탈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시인입니다. 그는 피렌체 르네상스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단테와 페트라르카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모인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카치오는 또한 외교관, 역자, 신화작가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 그의 <데카메론 Decameron>은 14세기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입니다.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떠난 일곱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이 나폴리 근처의 별장에서 열흘 동안 머물며, 매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100개의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10일간의 아라비안 나이트). 이 이야기들은 사랑, 불륜, 신분 상승, 인간의 탐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세 사회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오락적, 문학적 인기를 넘어 , 14세기 삶에 관한 중요한 역사적 문서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야기 모음집, <고금소총>과 결이 비슷합니다. 이 책 또한 당시 양반 사회의 위선적인 모습을 해학과 교훈적 풍자로 담고 있죠. 많은 부분이 성적인 유머와 음담패설로 구성되어 있고요.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가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자신의 작품이 불경스럽게  느껴져 불태우려 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스승인 페트라르카의 만류로 그대로 두었고 ,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인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난해한 표현은 없지만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여유와 기지가 일품인 책입니다.  



 


Isabella, 1848-49/wikipedia





그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이사벨라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붉은 옷을 입고 사랑하는 연인 '이사벨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가 로렌초이고요. 그들은 오렌지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수평으로 다리 하나가 보입니다. 포악해 보이는 오빠 중 한 명으로 호두를 까며 개의 엉덩이를 걷어차려 합니다. 조용히 쓰다듬고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과 무척 대조적이죠.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이 이곳저곳에서 드러납니다. 로렌초가 들고 있는 접시에 담긴 오렌지. 창가에 있는 큰 항아리와 시계꽃. 시계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식물로 꽃부리는 가시관을, 암술은 십자가의 못을, 꽃 수술은 못이 박히 그리스도의 다섯 군데의 상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JOC637xFuA&t=1s







<그림 2>. 키스당한 입 < Bocca Baciata, 1859>.  이 작품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패니 콘포스(Fanny Cornforth, 1835-1909)'라는 여성과 밀애를 나눌 당시에 만든 작품입니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단테 가브리엘은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했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크게 4명 정도입니다. 아내 엘리자 벳스 시달(Elizabeth Siddai, 1829-1862), 가정부, 정부, 뮤즈인 패니 콘포스(Fanny Cornforth, 1835-1909), 모리스의 아내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 그리고 모델 알렉사 와일딩(Alexa Wilding, 1847-1884)입니다. 





제목이 무척 도발적이죠. <키스한 여성>도 아니고, <키스당한 입>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당한"으로 묘사한 이유는 <키스당한 입>이라는 용어를 14세기의 작가 보카치오에게서 인용한 때문입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풀어헤친 옷, 온통 황금색 장신구와 장미로 치장된 그녀는 '농염함'에 훨씬 가까운 모습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고요. 그의 동료들과 비평가들은 이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아 "로세티가 금욕주의를 떠나 쾌락주의로 가고 있다."라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기술적으로 탁월하지만, 너무나 감각적이어서 구역질이 날 정도라며 혹평하기도 하고요. 그림 속 여성 '패니 콘포스 Fanny Cornforth, 1835-1909'가 유독 미운털이 박힌 이유는 아마도 그녀와의 밀회를 즐기는 와중의, 그의 부인 시달은 딸을 사산하고 우울증에 걸린 상태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내 그레이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가 선택한 삶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든 직업이든, 투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방향을 바꾸기는 더 어렵지요. 주변의 시선이나 비난이 신경 쓰일 수 있고요. '본전 생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과감하게 키를 돌려 자신의 길을 가는 게 행복의 지름길 일 수 있지요. 




누구보다 풍부한 예술적 재능을 지녔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바람기를 잠재우지 못해 아내인 엘리자벳 시달(Elizabeth Siddal)을 잃어야 했습니다. 죄책감은 엉뚱하게 친구 아내인 제인 모리스(Jane Morris)에게 꽂혀 잘 살던 가정을 흔들어 놓고 갑니다. 열매 맺지 못한 그의 재능이 안타깝습니다. 




누구의 삶이 더 옳다 할 수 없지요. 다만 비극적인 삶을 맞이한 한 쌍의 남녀에게 유독 신경이 쓰이는 것은 우리 또한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가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죠. 그나저나 엘리자벳 시달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단테의 <신곡> 작품 속 '제2 지옥'에서 서로를 알아보았을까요?  



 제목그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Pia de' Tolomei>, 1868, Spencer Museum of Art, Lawrence, Kansas/w 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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