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관점에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개인에게서 특정한 대상으로의 카르마 '유동량'은 '감정'의 강도로 알 수 있습니다.
언어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 언어에 들어간 감정이 중요하다.
감정이 중요한게 아니다. 카르마가 중요하다.
사실 감정은 전달되는 카르마의 양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미안하다’는 말을 왜 습관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가?
: 그 말 자체가, 미안함 = 죄책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게 카르마를 지속적으로 빼앗기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상징 의미 때문에 상대에게 추가 카르마를 빼앗기게 된다.(또는 공급하게 된다)
만약 죄책감이 전혀 없이, 그냥 입으로만 미안하다고 말하면 카르마를 빼앗기는가? 아니!
물론 언어 자체의 힘이 그런식으로 세뇌를 할 수 있지만, 정말로 감정이 없다고 가정을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언어와 함께 지불되는 카르마가 유의미 한 것이지, 언어는 정말로 소리의 진동에 지나질 않는다.
그런데 상대가 '미안하다'를 강요한다면, 미안하지 않더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싫다는 거부감 자체가 또 다른 카르마 공급이 된다.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래서 '기존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격렬한 저항을 하는게 아니라 그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따라주면서도 웃으면서 넘기는 것이다. 카르마를 빼앗기지 않는다. 그/그녀의 자존감은 이미 높다.
왜 말을 조심하라고 하는가?
언어는 그 자체로 상징이기 때문이다.
카르마가 교환되기 용이하게 만들어진 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 있는’ 말이, ‘영혼 없는’ 사과에 사람들이 그렇게 강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 새끼가 내 카르마를 뺏어갔는데, 진정어린 사과를 통해서 카르마를 돌려주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마음이 풀리게 된다. (빼앗긴 카르마를 다시 회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새끼가 그저 소리의 진동만을 전달하고 카르마는 돌려주지 않는다? 이건 불공정 거래이다.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아무튼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맞다. 대체로 언어에는 감정이 담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말로 뱉지 않고 생각만으로 카르마 유출이 계속 일어난다면 다를 바가 없다.
언어 그 자체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전달 자체가 카르마의 이동이다.
긍정 언어를 쓰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체도 자신을 제약하는 하나의 틀이 되어 버린다
긍정언어에 집착하려는 의도 자체가, 부정 언어가 끼칠 수 있는 피해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부정 언어 또는 불행이라는 관념에게 카르마를 빼앗기는 일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 언어에 집착하는 사람이, 부정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그렇게 주의를 주고 옮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본인의 카르마도 더 빼앗길까봐 (사실 이미 걱정하는 순간 빼앗겨버림)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욕'으로 도배를 하지만, 사실 아무런 부정적 감정이 들어가있지 않은 사람과,
입에서 나오는 말은 희망차고 긍정적인 언어로 가득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언어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사람),
누가 더 건강한 카르마 수급자일까? 전자라고 나는 본다.
굳이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 글은 노트에 쓴 글을 최소한으로 수정만 했기 때문에, 좀 더 날 것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카르마 흐름 이론을 개인 노트에 엄청나게 적고, 이것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입하여 엄청나게 분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유를 하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의 이해를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다.
브런치에 글을 적는 것은, 타인의 반응을 얻거나 확인하기 위함인데,
조회수를 제외하고는 반응이 없으니 아무래도 공유의 필요성이 적어지게 되는 것 같다.
'댓글'을 달아주시거나, 궁금한 점에 질문을 드린다면, 앞으로 글을 연재함에 있어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