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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디 Feb 05. 2024

'저항'에 대하여

'저항' : 어떤 것에 순응하지 않고 버티는 것


왜 저항하는가?

싫으니까

원하지 않으니까

나의 존재를 위협하니까

나의 정체성을 깍아내리니까

나의 정체성을 파괴하니까


저항하는 것은, 상대에게 카르마를 지급하는 것이고, 나의 세계 안에 상대의 출입권을 주고 상대의 존재감이 더욱 커질 수 있도록 카르마 feeding을 하는 행위이다.


저항의 대상이 지속되는 이유, 반복되는 이유, 자주 인식되는 이유는 그러하다.

내가 저항할수록 상대는 나의 세계 안에서 더 많은 카르마를 갈취하고, 더욱 존재감이 확장되는 것이다. 내가 식민지화가 되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원시인류는 생존을 위해서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에 더 예민하게 진화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것은 쉽게 잊혀지는 반면에 부정적인 것들은 오래 가고, 길면 평생간다고 하는데 어찌되었건.....



그런 측면에서 저항의 대상에 대한 생각들을 나눠본다면


1) 저항의 대상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

내가 틀렸다고 보는 것


강렬한 부정적 반응은 상대를 더 배불리 먹여주는 카르마 feeding에 해당한다.


그것은 강렬하게 다가오고, 반복되고, 인식되고, 목격되고 두려움의 형태인 생각과 관념으로, 또는 실제 경험의 형태로, 자주 드러나는 것을 통해 나의 에너지를 갈취해간다.


2) 사실 그 누구도 이런 에너지 강탈 행위를 용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대응하게 된다.


해결책을 찾게 되는데 그 해결책이라는 것은 카르마적으로 보면 맞불작전에 해당한다. 반대를 의미하는 상징을 찾아서 그것에 강한 카르마(시간, 실제 실행, 돈, 몰입) 등을 투자하는 것을 통해 내가 기피하던 것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상쇄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면에서는 단순한 부적도 실제 효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부적의 과학적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념 안에서 내 저항의 대상에 대한 대항마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쓰는 경우가 많다. 폭식을 한 다음 날은 굶게 된다거나, 아플 때에는 약을 먹는다거나,


해결책을 찾는 것은 사실상 맞불작전이기 때문에 저항 대상의 파괴력이 강할 때에는 해결 방안에 '집착'하게 된다.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면 저것을 피할 수 있지만, 이것을 멈춘다면 저것을 다시 겪에 될거야. 그런 면에서 절대 멈추면 안되고 계속 유지해야만 해.'라는 강박과 집착이 생기게 되는데, 장기화되면 자아정체성으로 굳어지게 된다. 물론 이것이 안좋다는 말은 아니다.


다이어트 약에 의존하거나 굉장히 엄격한 수준의 다이어트를 한 사람들은, 살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바탕으로 대항마인 strict한 다이어트에 의존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것을 멈추자마자 강한 요요가 오는 현상은 카르마적으로 보면 이상하지도 않다.

여전히 체지방과 비만 상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유지한 채로 대항마에 대한 의존을 했던 것인데, 대항마를 놓아주자마자 저항이 다시 부각되며 그 존재감이 거대해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문제와 해결책은 존재감 측면에서는 공생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에게 존재감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병이 없으면 약이 없고 약이 없으면 병이 없다. (재미있다는 것이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님)



다른 경우가 있다. 명확한 해결책이 없거나, 해결책의 실행이 어려운 경우이다.

1) 가족문제, 사람문제

2) 생계문제, 일터

3) 나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들

4) 적극적 대응을 하기에는 사소한 것들, 하지만 여전히 싫고 굉장히 거슬리는

에 대한 것들이 특히 이러한데, 명확한 대응을 하기가 어렵고 맞불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뱀파이어에게 쭉쭉 카르마를 빨리고 있는 상태이다. 너무 싫은데 해결할 방법이 없거나 너무 어렵거나, 해결이 어떤 희생을 요구하거나 내 정체성의 위협이나 파괴를 가져오는 경우.


이런 것들은 실제로 존재감을 갉아먹기 때문에 사람이 더욱 피폐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 맞다.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지 않은 이상 자유로워지기 힘든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기존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방면에서의 에너지 충전행위를 쓰게 된다. 빼앗긴 카르마를 충전하기 위해 남들에게 하소연하기, 좋아하는 일 하기, 취미생활하기, 자신만의 스트레스 풀기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다른 방법도 가능하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그런 면에서 중도를 추구하는 것, 대상을 허용하고 수용하는 것이 저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행동이 아닌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저항의 대상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상대를 향해 보이는 감정의 강도가 상대에게 힘을 주는 요인이기 때문에 감정의 강도를 줄이는 것이다. 더 이상 거슬리지 않는다면 잘 목격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저항 자체가 저항을 지속시킨다"

"어차피 내가 저항하기 때문에 그것이 인식된다"


허용으로 돌아가서, 그저 상대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한으로 가보자


내 저항의 대상이

1) 발생해도 괜찮고, 일어나도 괜찮고

2) 지속되고, 유지되어도 괜찮고

3) 반복되고, 재발해도 괜찮고

4) 상황이 악화되고, 더욱 나빠져도 괜찮고

5) 내가 두려워하고 최악으로 여기는 일들이 정말로 발생해버려도 괜찮아


1) 회피할 수 없어도 괜찮고

2) 개선되거나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고

3) 해결되지 않고 제거되지 않아도 괜찮아


끝까지 가보는거다. 끝까지. 단순히 말로만 하는게 아니라. 느껴보는거다.


그 존재를 인정해버리면 더욱 잘 나타날 것 같지만, 상대는 내가 만들어낸 '문자의 배열, 단어의 나열'에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향해 보내는 인식+감정의 정도에서 존재력을 공급받는다.


입으로는 존재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세계 안에서의 출입권을 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추방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그것이 싫다고 백날 말했지만, 어차피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1) 이제와서 그것이 괜찮다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나? 싫다고 말해도 안없어지는데 좋다고 말하고 괜찮다고 말해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비이성적인게 아닐까? 그러니까 해보자

2) 그런면에서, 시도 후에 실제로 영향력이 적어진다면 개땡큐이지 않을까?

3) 만약 그것이 실제로 좋아져버린다면? 정말로 괜찮아져 버린다면? 그것도 괜찮은게 아닐까?


아주 사소한 예시로 접근을 해보자

멸치볶음을 싫어해서 멸치 볶음 반찬이 나오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짜증나고, 입맛이 뚝 떨어진다.


1) 평생 멸치볶음을 싫어했는데 어차피 계속 목격되고 스트레스를 준다. 이는 멸치볶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강력한 카르마 feeding이다.

2) 멸치볶음을 극한으로 허용해본다.

3) 갑자기 멸치볶음이 거슬리지 않는다

4) 멸치볶음이 잘 인식되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알고보면 그런 것들이 많다. 무관심의 영역에 있는 것들

5) 실제 마주침 횟수가 적어진다.

이런 느낌이다.

 

* 허용과 더불어 맞불작전도 같이 쓴다면 상대적으로 더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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