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취미, 특기는 무엇입니까?
까무잡잡 건강함 뽐내는 피부에 반짝반짝 맑게 빛나는 눈동자, 환브로 엄마의 유년 시절이다. 노래와 춤도 곧잘 해내는데, 멍석을 깔아주면 평소보다 더 멋들어진 실력을 뽐냈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재능을 살려 뮤지컬 배우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더라. 하지만 막연한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머님 반대도 심했다. 금수저라도 물고 태어났더라면 많이 달랐을 텐데, 아니면 20년 정도 늦게 태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픽미업'을 외치고, 성공한 아이돌이 됐을지 모른다.
체념한 듯 한 마디 던진다. "그냥 취미로 열심히 쳐볼게요."
고고학자를 꿈꾼 지환이가 장래희망이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피아노 학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고, 개인레슨을 추가로 받고 싶다고 속삭인다. 하지만 음악 문외한인 엄마 아빠가 봐도 피아니스트의 길은 고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에 선뜻 지지를 보내주지 못한다. 마음이 무겁지만, 견뎌야지. 게다가 솔리스트로 성공하지 못한 남자 피아니스트의 일상은 편안하지 않다고 하지 않나. 남자 피아노학원 선생님은 반겨주는 곳도 없다는데. 눈치 빠른 지환이는 며칠 지나지 않아 체념한 듯 한 마디 던진다. "그냥 취미로 열심히 쳐볼게요."
둘째 려환이는 다행히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은 듯하다. 음악에 재능이 넘친다. 절대음감이라고 자랑하고 다닐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다. 먼저 피아노를 배운 형보다 세 살이 어리지만, 곧잘 따라 흉내도 내고, 화음도 쭉쭉 집어넣었다.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도 곧잘 불러댄다. 그러던 어느 날 려환이는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선언했다. 레슨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이 녀석은 지환이와 또 다르다. 애초에 취미로 배우고 싶다는 거다. 취미치고는 꽤 투자가 필요한 고급 취미일 텐데, 부담부담도 어쩔 수 없다. 조금 배우다 어려우면 떨어져 나가겠지.
취미로 시작했지만 취미로 끝나기 조금 아쉬운 재능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전공을 시킬 정도의 음악 천재는 아니라니, 이 또한 어정쩡하다. 그래도 혹시나 아쉬움을 남기지 말자는 생각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시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하던 선생님도 언젠가부터 려환이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분명 천재는 아닌데, 음악을 즐긴다. 장난스러운데 성실하고 가르쳐주는 이야기를 쉽게 잘 이해하고 따라준다. 어떤 스승이 이런 아이를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취미로 여겼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콩쿠르에도 참가했다. 지역의 작은 콩쿠르지만, 기본기가 탄탄하고 좋다는 심사평이 반가웠다.
"나 잠깐 소리 내서 울어도 되지?" 려환이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바이올린과 인연을 맺은 지 3년이 조금 넘어선 어느 저녁 시간, 바이올린 연습을 하던 려환이가 갑자기 울상을 짓는다. 눈물이 그렁그렁, 그래도 꾹 참아내던 꼬마는 아빠품에 안겨 속삭인다. "나 잠깐 소리 내서 울어도 되지?" 려환이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눈물이 많은 편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많이 진지하다. 연습하는 곡이 너무 어렵다는 하소연... 하지만 눈물을 쏟은 건 곡이 어려워서가 아니라고 한다. 멋지게 연주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란다. 조금 쉬운 곡을 연주해 보자고 다독여 보지만, 좀처럼 려환이의 울음이 멎지 않는다. 단순한 과욕이 아니다.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을 때, 그 안타까움을 우리는 누구나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중학교에 입학한 지환이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못한다. 해마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마련한 작은 연주회도 더는 참여가 쉽지 않을 상황이지만, 다행히 지환이는 피아노를 놓지 않았다. 학교 음악실 피아노를 놀이터 삼아 열심히 두드린다. 지환이의 피아노 사랑을 하늘이 알아준 걸까, 담임 선생님도 음악 선생님, 피아노 전공이다. 동아리 활동도 마침 밴드다. 건반을 담당할 친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기로 했다는데, 목소리에서 은근 자부심이 묻어난다. 세상의 모든 밴드가 그러하듯 멤버들과 티격태격 쉽지 않은 연습이지만, 클래식 피아노에만 몰두하던 꼬마는 어느새 은근 K-POP도 즐길 줄 아는 청년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잘하고 있다.
취업 문턱을 두드리던 시절, 이력서를 쓸 때면 고민이 있었다. 취미는 무난하게 '독서'라고 적어내면 된다고 하는데, 특기가 마땅하지 않다. 누군가 거짓부렁으로 특기를 '스페인어'라고 써냈다가, 스페인어 전공 면접관을 만나 망신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사실 그 시절 학생들의 특기라고 하면 별다른 게 있었을까. 공부, 공부, 공부... 성적 올리는 데 혈안이 됐던 시절 아닌가. 그렇다고 특기를 '공부'라고 쓰기는 애매하다. 아이들처럼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열정을 더해 무언가를 배우고 즐겼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환경이 쉽지 않았다. 그랬을 거다. 30여 년 전 꼬마들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을까.
지환이가 밴드 공연 무대에 올라 건반을 두드린다. 연주에 집중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보고는 깜짝 미소를 선물한다. "그냥 취미로 열심히 쳐볼게요." 아이의 꿈을 너무 쉽게 꺾어버린 건 아니었나, 무거웠던 마음에 그나마 평온이 찾아들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팔이 떨어져라 감사의 박수로 화답한다. 사실 혹시 모를 일이다. 지환이의 피아노 연주가 취미 이상이 될지 그 누가 알까. 려환이의 바이올린 소리가 언젠가 갑자기 멈춰 서고, 대뜸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나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취미일 수도, 특기일 수도, 직업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꼬마들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물론 선택을 무조건 지지할 수는 없지만, 선택에 대한 존중은 시대가 요구하는 부모의 취미이자 특기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