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백'의 진실을 밝혀볼까
언제나 꼬꼬마일 것 같았던 려환이도 어느새 초등학생이 됐다. 코로나19 확산을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직격으로 맞닥뜨린 세대이다. '작은학교'에 다니는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업 결손이 적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교실에서 지지고 볶는 수업과 차이는 분명했다. 그렇다고 사교육의 힘을 빌려야 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초등학교 저학년이 한글과 구구단을 어느 정도 소화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른 영역은 차차 또 채워나가면 될 테니까. 하지만 정작 당시 엄마 아빠는 난생처음 직면한 '코로나19 사태'가 혼란스러웠나 보다. 부끄럽게도, 방학을 맞은 려환이의 두 손에는 어느새 한 학기를 정리하는 작은 '문제집'이 들려있었다.
와, 벌써 다 풀었어? 어디, 와 이번에도 다 맞았네!
려환이는 문제집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글은 물론 숫자 읽기도 아직은 벅차기만 한 꼬꼬마에게 문제집은 솔직히 부모 욕심이었다. 하지만 뭐에 홀렸는지 엄마 아빠는 려환이와 함께 책상머리에 둘러앉았다. 공부하고 생각하면 어렵고 힘들 일일 텐데, 엄마 아빠와 수다를 떤다는 생각이었을까. 려환이는 이내 적응하기 시작했고, 문제를 척척 풀어냈다. 아마 형님 따라 어깨너머로 공부 흉내 좀 내본 덕분이었으리라. 그래 봐야 '7+5' 수준이었지만, 사실 주변에 대고 '7+5'를 물어보시라. 10명 중 한 두 명은 '13'이라고 답을 할 거다. 하하... 그렇게 려환이는 '척척박사', '수학영재'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얻어가가기 시작했다.
나름 공부에 재미를 붙인 걸까. 려환이는 언젠가부터 엄마 아빠와 함께 문제를 풀지 않았다. 작은 방에 들어가 꽁냥꽁냥 시간을 보내고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타나, 엄마 아빠에게 채점을 요구했다. 간혹 실수로 틀린 몇몇 문제를 빼고는 대부분 정답, 정답, 정답... 틀린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친절한 오답풀이를 해주면, 이 녀석 반짝이는 눈망울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정답을 맞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느냐 물으면, 한두 문제를 꼽아 설명을 요구한다. 엄마 아빠는 려환이 같은 아이는 한 트럭을 가져와도 공부를 가르칠 재미가 있겠다며 한바탕 행복의 깨소금을 볶아본다.
려환이가 태어나기 20여 년 전인 1990년 어느 날, 원주시 초등학생(국민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진단평가가 시행됐다. 왜 그런 시험을 봤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이해가 안 되지만,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을 찾아내 특수훈련을 시키려 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 시험을 잘 치른 아이들 대부분이 이른바 '경시대회반'이라는 특수집단에 소속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시험에서 유일하게 이른바 '올백', 만점을 받은 아이가 있었데, 다름 아닌 '환브로의 아빠'되시겠다. '척척박사', '수학영재'의 계보는 그때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하하...
하지만 꽤 많은 세월이 지나 열린 동창회에서 한 친구는 꽁꽁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환브로 아빠를 좋아했었다고.... 예나 지금이나 이놈의 인기란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는 걸까. 잘 더듬어지지 않는 기억이지만 애써 수습해 보니, 이 친구가 시험 당시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대체 무슨 러브라인일까 싶지만, 사실은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바보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특출 나지도 않았던 아이가 '올백'을 맞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OMR카드가 아닌 시험지에 적힌 답을 그대로 채점하던 시절, 선생님이 아닌 바로 앞자리에 앉은 다른 친구가 선생님이 불러주는 답을 듣고 채점하던 시절이었다. 그랬다. 친구는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오답을 조심스레 고쳐 '올백'을 선물했다.
어? 당연하지, 내가 안 풀면 어떻게 답을 찾겠어?
려환이의 문제풀이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간간히 등장했던 틀린 문제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설마 려환이를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려환이의 몸속에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제가 워낙 쉬워 답안지를 활용하지 않고 직접 문제를 풀어 채점을 하다, 어느 순간 문제집 뒤쪽 답안지를 보고 채점을 해왔다. 려환이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채점을 했다. 아뿔싸. 답안지의 존재를 알게 된 려환이에게 얼마나 큰 유혹이었을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려환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려환이가 문제를 직접 다 풀고 있는 거 맞지?" 살짝 정적이 흘렀다. 려환이는 이내 직접 문제를 푼다고 답했지만, 잠시의 정적이 갖는 의미는 분명했다.
살금살금 려환이가 문제를 풀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 음료수도 챙겼다. 조용히 방문을 열었는데 두근두근 심장소리가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는다. "려환아, 음료수 마시고 해" 갑작스러운 방문에 려환이가 당황한다. 재빨리 무언가를 책상 아래로 감췄지만, 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분명 답안지다. 멀리 살짝 보이는 작은 글씨가 이상하리 만큼 커다랗게 보였다. 답안지 맞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려환이도 눈치챘을까. 조용히 음료수를 건네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튿날 엄마와 아빠는 조용히 책상 밑에 놓인 답안지를 치워버렸다. 그리고 려환이를 불러 다시 물었다. 문제를 스스로 풀었는지 되물었다. 다시 또 잠시의 침묵이 흘렀고, 이번에는 아빠가 정적을 깨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런데 문제를 잘 몰라도 되고, 틀려도 괜찮아. 다음에도 잘 이해가 안 되면 엄마나 아빠에게 물어 봐. 려환이 파이팅!" 그리고 려환이를 꼭 안아주었다. 작은 꼬꼬마가 얼마나 긴장을 했던 걸까.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자마자, 려환이의 어깨가 들썩인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려환이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줬다.
4학년이 된 려환이는 요즘도 무엇이든 열심이다. 아빠가 그러했듯 려환이도 '척척박사', '수학영재'는 아니다. 하지만 집중력 있게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을 혼내지 않고 조용히 품어준 엄마 아빠도 스스로가 대견하다. 큰소리로 화를 냈더라면 어떠했을까. 왜 이런 힘든 공부를 시키느냐고 려환이가 발끈했으려나. 엄마 아빠는 이제 려환이에게 문제집을 강요하지 않는다. 려환이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문제집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답안지? 답안지는 문제집 뒤에 그대로 달려있고, 엄마 아빠가 바쁘면 스스로 채점을 한다. 이제 려환이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한 기억이 없다며 살짝 웃는데, 그건 또 거짓말일 수 있겠네.